= 인도 India/델리

[스크랩] 조각과 건축으로 보는 인도의 문화.

arakims 2013. 11. 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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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과 건축으로 보는 인도의 문화

 

윤 종 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1. 인도문화

 

인도는 세계 4대 문명지의 하나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오랜 전통 속에 꽃을 피운 인도문화는 중국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상체계로 아시아문화의 근간을 이루며 세계문화의 축을 형성해 오고 있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만큼 다양한 신과 그들의 이야기인 전설에 담긴 문화의 역동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항상 그 힘이 넘쳐 흐른다.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는 때론 대서사시와 같은 문학이 되고, 문학은 사유의 단계를 거쳐 철학이 되며, 다시 종교로 승화되어 염원의 미술을 탄생시켰다.
특히 인도미술은 불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 불교미술의 원천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인도미술은 현대의 인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과 스리랑카를 포함한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권에 탄생한 미술을 말한다. 인도미술은 이러한 범위만큼 실로 다양하며, 시대와 지역, 사회 집단과 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변해오는 역사적 존재를 포괄하고 있다.

 

2. 인더스 문명(기원전 2,500~1800년)과 인도미술

 

인도에서의 최초의 도시문명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북쪽 인더스 강유역에서 일어났다. 인도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신두Sindu에서 유래하였다. 신두는 페르시아어로 힌두Hindu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인디아India로 부르고, 한자로는 인도印度라고 쓰고 있다. 신두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인도 문명이 강에 기반으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일어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은 이러한 문명을 대표한다.
특히 이곳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소조상은 가슴 부분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여성이 지니는 풍요로움과 생명의 탄생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여신상은 흔히 대지의 여신으로 지모신의 역할을 하는데, 여신에 대한 숭배는 인도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인도에서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종교유적이나 거대한 기념물은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모헨조다로에서는 종교적 세정의식洗淨儀式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목욕탕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3,500여 개에 달하는 인장에는 종교와 관련된 그림이 남아 있다. 인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황소는 힘의 상징으로 시바가 타는 다니는 동물이다. 또한 코끼리는 베다시대 이래 인드라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신성한 동물이다.

 

인장의 인물상은 요가자세로 정좌를 하고 있으며, 머리에 3개의 커다란 뿔이 달린 관을 쓰고 있어 제사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남근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시바의 링가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곳에 발견된 남성 조각상은 종교적 근엄한 얼굴로 정면을 내려다보는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를 들어 낸 법의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로 인해 종교와 정치적 권위를 함께 지닌 왕이나 신관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상은 옷의 문양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 서아시아와 관련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청동 여인상은 여성성이 강조되지 않고,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어 춤추는 소녀로 추정한다. 이 소녀의 얼굴은 이마 선이 올라가고 입술이 도톰하여 남방계 여성으로 보고 있으며, 목걸이와 팔찌는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착용되는 장신구이다.

 

 

3. 아리아족과 초기왕국 (기원전 1800~322년)

 

기원전 20세기경에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던 아리아족의 일부가 기원전 15세기 무렵 이란을 거쳐 인도의 서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그들이 인도로 들어와 형성시킨 종교문헌인 ?베다Veda?를 탄생시켰다. 베다Veda란 ‘안다’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비드vid에서 파생한 말이다. 넓은 의미로는 기록될 가치가 있는 지식 전체를, 좁은 의미로는 성스러운 지식이나 종교적 지식을 뜻한다.

 

베다에는 인도-아리아인이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다양한 신이 등장한다. 번개와 비의 신 인드라Indra, 우주의 질서를 보호하는 신 바루나Varuna, 불의 신 아그니Agni, 태양의 신 수리야Surya, 환각성이 있는 식물을 인격화시킨 소마Soma, 새벽의 신 우샤스Ushas 등 주로 자연현상이나 자연력을 신격화시킨 것으로 주로 신화에서 그들은 인간이나 동물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베다 신화의 주제는 신과 악마의 전쟁, 선과 악의 대립, 창조와 파괴의 공존 등이다.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해서 원주민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고대 베다 종교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힌두교의 신학적인 종교화 과정이 이루어지면서 고대 베다의 신들이 전면에서 사라지고,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새로운 힌두 신앙의 주요 신들로 등장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것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직업· 종교적인 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은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신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며 인격신이 숭배되고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힌두교는 하나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인도의 사회·관습·전통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로 힌두의 생활양식이자 힌두문화의 총체이다.

 

기원전 7세기경부터 브라만 계급의 권위와 경직된 제식주의를 넘어 세계와 인간을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는 사상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을 이때부터 등장한 ?우파니샤드?라는 문헌을 통해 정리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5~6세기경에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시타르타와 자이나교를 창시한 바르다나마가 등장한다.

 

4. 마우리아 제국

 

마우리아라는 공작孔雀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을 끝내고 철수한 뒤인 BC 317년경, 찬드라굽타는 북서 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마가다의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마가다 국왕이 되었다.
그는 인접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거의 인도 전역에 걸친 통일국가 마우리아제국을 형성하였다

 

그의 통치는 24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들에 이어 손자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여 36년간 통치하였는데, 이 시대가 왕조의 최성기로 알려져 있다.

 

아소카왕(BC 272∼BC 232, 阿育王, 轉輪聖王)은 동남부 칼링가 정복 전쟁 중에 적군 10만 명과 자신의 부하 1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해 아소카왕은 기원전 260년경부터 불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이고, 인도 각지에 세운 비석인 돌기둥에 다르마Dharma의 의미와 법칙을 새겨 그의 뜻을 펼쳤다.

 

 

"육식을 버리고 살생을 삼가며 흰개미에서 앵무새까지, 돌고래에서 하마까지 모든 생명을 보전하라."

종교들 사이의 소통은 선한 것이다.
다른 이들이 따르는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하라.
대왕께서는 모든 이가 다른 종교들의 선한 가르침을 잘 익히기를 바라신다.’

 

 

한편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8만4천 개로 나누어 제국 각지에 탑파를 세웠다.
아소카왕이 만든 대표적인 수투파가 바로 산치의 수투파Stupa이다. 산치 스투파는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쉬주의 보팔 근처 북부 4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1818년 한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1912~9년 사이에 존 마샬에 의해 현재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산치의 스투파는 크고 작은 것이 20여 개였으나, 대부분 파괴되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산치 대탑이라고 불리는 제1탑과, 제 2탑, 제 3탑이 남아 있다.

 

 

산치 스투파의 복원도

 

산치 대탑은 아쇼카왕 석주의 명문으로 보아 아소카왕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수투파는 벽돌구조로 지름이 18m 정도 된다. 이후 숭가왕조(BC 184~148) 때 확장되었으며, 현재 복발覆鉢은 지름 36m 로 복발 하부에 기단을 설치하여 난순欄楯을 돌렸으며, 사방에 토라나Torana를 설치하였다.

난순Vedika은 울타리로 경계와 보호의 의미를 지니는데, 받침돌 위나 땅에 적당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가로 대 3개를 걸쳐서 연결하였으며, 정상에 난간 돌을 얹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투파 참배는 난순을 통해 하는데, 해가 뜨는 동쪽에서 시작해서 남, 북, 서쪽으로 이동한다. 인도에서는 오른쪽이 길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를 우요右繞라고 한다.
복발은 가르바(자궁)와 안다(알)로 부르며, 산개傘蓋는 햇빛 가리개로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 산간傘竿은 우주의 기둥이며, 토라나는 문의 역할을 한다.

 

 

 

 

산치 대탑의 토라나에는 숲의 정령인 약사상이 망고나무를 잡고 있는 조각이 있다. 무우수를 잡고 부처를 낳는 마야부인상과 유사한데, 풍요의 여신으로 가슴과 둔부가 강조되어 있다. 화사한 팔찌와 발치를 장식하고, 춤을 추듯 교차되는 발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 상은 약시상이지만 약사상처럼 수문장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소카왕은 다르마(보편적 윤리)에 의거한 고대 제왕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아소카왕의 사망으로 세력을 잃고 BC 180년 최후의 왕 브리하드라타의 장군 푸샤미트라 (슝가왕조의 시조)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갠지스 강의 지류인 손강에는 바후투 수투파가 있다. 이 유적은 1873년 발견 당시에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그 일부가 콜카타 박물관을 이전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 수투파는 지름 20.6m이며, 난순에는 다양한 조각상이 있다.

 

 

5. 쿠샨왕조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처음 쿠샨 왕조는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자를 썼고, 그리스를 본 따 동전을 만들었다.

 

쿠샨 왕조는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 문화와 불교 문화가 융합된 그리스식 불교가 발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방으로 퍼져 중국에는 대승불교로서 전해졌다.
쿠샨의 카니시카왕(2세기경)은 불교를 부흥시킨 왕 중 하나였다. 카니시카 왕 때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 하게 되던 초기 불교에서 대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승 불교가 갈라져 나온다. 이 때 나르가주나는 대승불교 이론을 정리하였고, 카니슈카왕은 대승불교의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원래 부처는 신을 믿지 않았고, 사람을 차별하는 카스트 제도와 승려의 권위주의도 부정하였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부처나 승려의 상을 형상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쿠샨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교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를 더 잘 믿기 위해 불상을 만들고 수투타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간다라 지역에서 만든 불상은 모두 곱슬머리를 한 그리스 사람 모습에다 주름이 많고 장식적 옷차림을 하고 있다. 반면에 교통의 요지인 마투라 지역에서 좀 인도적 모습의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뒤 인도의 남부지역에서 안드라 왕조가 발전을 한다. 안드라는 드라비다족으로 남인도의 고다바리, 크리슈나 두 강 하류지역을 본거지로 하였으며, 사타바하나Sātavahāna, 또는 샤티카르니Śātakarni라고도 한다. 데칸고원 북서부를 중심으로 서인도 일대에서 B.C. 1세기 후반~A.D. 2세기 초기에 세력을 확보하였으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을 위의 두 강 사이에 있는 안드라Andhra-desa에 옮긴 후 3세기 전기에 멸망한 것으로 본다. 대對 로마 무역에 의한 부를 이용하여 불교미술의 주목할 만한 번영을 보기에 이르렀다. 즉 서인도에서는 제1기 불교석굴사원의 대부분의 개굴開掘에 관계했으며(1~2세기), 또한 동남 안드라 지방에서는 아마라바티Amaravati 대탑을 장엄하게 만들어 남인도 특유의 조각미술을 개화시켰다(2~3세기).
그 외에 바티프롤루Bhąţti-prolu, 자가야페타Jaggayyapęta, 골리Goli 등 불교유적을 남겼다.

또한 이 탁월한 미술의 전통은 그 후 크리슈나 강 하류에 일어난 이크슈바쿠Iksvāku 치하의 나가르쥬나콘다에게 계승되었다(3세기 후반).

 

쿠샨시대의 수투파는 종전의 원통형 기단 밑에 사각형의 받침대를 첨가하며, 이 받침대에 계단을 만들었다. 이후 원통형 기단의 층수가 높아짐에 따라 수투파와 함께 조각된 불상이 예배대상이 되었다. 특히 탁실라의 달마라지카 대수투파에는 불당이 주위를 돌아가며 설치되었다.

 

 

 

 

안드라의 군투르에 있는 아마라바티Amaravati 수투파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창건되었으며, 2세기에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증축된 수투파는 지름 50m 로 대형인데, 18세기 말에 파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수투파에 사용된 판석들이 수습되어 콜카타와 마드라스 박물관 및 영국박물관에 보존되어 화려한 조각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수투파에는 사면에 장방형으로 돌출된 제단과 같은 장치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또한 정상부에는 아야카Ayaka라는 5개의 기둥을 세웠다.

 

한편 아마라바타의 서쪽 105km 지점의 나갈주콘다Nagarjunkonda에도 수투가 확인되었다. 이 수투파는 수레바퀴 모양으로 벽돌 벽을 쌓고, 그 안에 흙을 채워 기단을 만든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한편 인도의 서북부지역에는 간다라의 수투파 양식을 반영한 봉헌을 위한 소형 수투파가 많이 남아 있다.

 

석굴사원은 우기에 비를 피해 기거할 수 있는 동굴이나 움막에서 공동으로 의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스투파를 중심으로 승려가 기거할 수 있는 작은 방으로 구성된다.
석굴사원은 승려들을 위한 승원굴 비하라Vihara와 신도를 위한 예배굴인 차이티야Chaitya(支提)로 크게 구분된다. 차이티아는 장방형 평면의 예배공간과 원형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굴은 절벽 표면을 다듬은 다음 정면과 입구를 만들고, 실내 천장 높이에서부터 아래로 굴착하였다. 정문에는 커다란 문 위쪽에 아치형 창문 설치하였다. 또한 목조 건축을 모방하여 돔형 천정과 목조 서까래를 연출하고, 양쪽에 열주로 구분된 회랑을 두었다.

 

석굴사원은 아소카왕 때 이미 만들어 졌다. 왕사성 부근 바라바르 힐에 있는 로마스 라시Lomas Rsi 석굴은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아소카 12년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 석굴은 타원형 방(5.2x4.3 m)과 장방형 방(10.3x6m)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방형 방의 측면에 있는 출입구는 목조 건축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이 석굴은 자이나교의 일파인 아지비카Ajivika파의 수행자들이 우기에 사용하던 석굴이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부터는 현재 마하라슈투라주의 봄베이시를 중심으로 반경 500km 거리에 집중적으로 불교 석굴사원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불교 석굴사원은 비자 석굴, 베드사 석굴, 콘다네 석굴, 피탈르코라 석굴, 나식 석굴, 카를리 석굴, 쥰날 석굴, 아잔타 석굴 등이다.

 

 

6. 굽타왕조

 

3세기 중엽에 쿠샨 왕조의 세력이 쇠퇴하여 북동인도가 그 지배에서 벗어난 후 작은 지방 지배자가 할거하였다. 사무드라 굽타 왕은 갠지스 강 상류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복, 병합하여 조공을 거두고, 데칸으로 진군하여 멀리 칸치의 팔라바왕을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찬드라 굽타 2세는 사카족을 쫓아내고 뱅골과 신드를 병합하였다. 찬드라 굽타 2세는 열렬한 예술 보호자로서 인도 최대의 평화시대와 함께 인도 최대의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는 이를 계승하여 1세기 이상에 걸쳐 전성기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쿠마라굽타 1세의 만년부터 굽타왕조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훈족의 침입으로 타격을 받고, 이어 6세기 전반에 아쇼다르만의 세력에 위협을 받아 마가다를 영유하는 소왕국으로 전락한 굽타 왕조는 그 후 2세기 남짓 존속하다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벵갈에서 일어난 팔라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인도 문화가 그동안 이민족의 침입으로 변질되자 아리아족의 고유한 것을 되찾으려는 복고적 움직임이 이 때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 시대는 제국의 물질적 번영과 군주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문학, 예술, 종교가 동시에 눈부시게 발달했던 시대였다.

 

원래 5세기 초에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는 정책도 폈으나, 후대의 굽타 왕들은 힌두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제3대 왕 찬드라굽타 2세 시대는 고대인도 문화의 최대의 황금기로서 브라마니즘과 더불어 불교도 보호를 받아 발전하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 두 가지 종교는 토속신앙과 결합하여 인도의 정서를 대변하고 인도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힌두교를 성립시켰다.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전통적인 힌두 문화를 중시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굽타 왕조는 일조의 복고 왕조라고 할 수 있다.

 

베다 성전에 대한 가치관이 재인식되고 브라만적인 색채가 짙은 힌두의례가 부활되었다.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힌두의 종교의례가 침투되어 의례 양식으로 확립되어 갔다. 시바, 비슈누 같은 힌두교의 주요한 신들은 토착문화를 흡수하면서 그 기능과 성격을 높여 갔으며, 이에 따라 힌두 신화도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굽타 미술에서는 불상과 힌두신상을 완벽한 형태로 발전시켜 놓았다. 굽타시대의 미술은 흉노족과 그 후 모슬렘 침략들의 파괴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석굴사원은 잘 보존되어 있다. 아잔타와 엘로라의 동굴미술이 그 좋은 예이다.
아잔타의 경우 29개의 동굴에 건축, 조각, 회화가 집약되어 있으며, 특히 벽화와 천정화는 인도불교미술의 극치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잔타 화풍은 서부 인도의 미술과 페르시아 미술과의 융합을 나타내고 있다.

 

굽타 왕조는 6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하더니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목민족의 침입을 받아 인도는 다시 소왕국 분립시대로 접어든다. 이러한 혼란기인 7세기 초 바르다나 왕국의 영주 하르샤가 나와 남인도를 제외한 인도 영토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바르다나 왕조를 건설함으로써 굽타 시대를 다시 찾게 된다. 하르샤 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중국 당나라와 국교를 맺어 구법승인 현장 법사가 인도에 와서 공부하도록 했다. 현장은 인도의 날란다 승원에서 연구하고 돌아가서 유명한 ?대당서역기?를 썼다.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군은 인도 최대의 석굴군으로 유명하다.

 

 

 

아잔타 석굴은 마하슈트라의 동쪽 경계의 험한 산의 계곡 사이에 만들어진 가람으로 1819년 영국 기병대의 존 스미스가 호랑이 사냥 중 발견하였다. 석굴의 이름은 문헌에 등장하지 않아 마을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석굴은 아고라강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76m 높이의 원형 산에 형성되어 있는데. 바위 계단이나 나무 사다리를 통해 강으로 연결된다. 석굴의 굴착은 위에서 아래로 채굴하였으며, 거울의 반사광 이용하여 조명으로 사용하였다.

 

석굴의 조성 시기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 석굴 사원은 기원전 1세기부터~기원후 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10, 12, 8, 9, 13, 15굴이다. 후기 석굴 사원은 450~500년에 조성된 6, 7, 11굴, 550~600년에 조성된 15~26굴, 600~625년에 조성된 1~5굴, 625~642년에 조성된 27~28굴 등이 있다. 석굴은 29개의 석굴사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원형의 차이티아 가운데 소승불교와 관련된 것이 9굴과 10굴 (앞에 방이 없음)이며, 대승불교와 관련된 것이 19굴과 26굴이다. 장방형의 비하라는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승방의 규모가 커지자 중앙홀의 안쪽에 불당을 만들어 불상 배치하였으며, 독립된 승방에도 불감을 설치하였다.

 

제 19굴은 대승불교의 차이티야로 규모는 소승불교의 9굴과 유사하나 가장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정면에 연꽃모양의 창을 내고, 창 좌우에 약샤 수호신을 조각하였다. 정면 창 하부에 조각 기둥을 설치하고 벽면도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정면 앞 좌우벽에는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조각하고, 열주와 이마돌에도 부조 장식을 하였다. 스투파에는 상부 아치형의 감실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돔형 천정에 반원형으로 휘어진 서까래 설치하였다.

 

아잔타 19굴 정문에는 본생담에 등장하는 연등불이 표현되어 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가 전생에 수메다라는 젊은 수행자로 태어나 정광불을 찾아가서, 깨달음을 얻은 모습에 감명 받아 꽃을 공양했으며, 정광불이 진흙을 걸지 않도록 자신의 머리를 풀어 밟게 했다고 한다. 왼쪽의 여인은 석가가 꽃을 샀던 여인으로 흥정을 하면서 미래에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한 전생의 프라크르티가 조각되어 있다.

 

제 10굴은 2층으로 차이티야 석굴이며, 제 26굴은 최후에 만들어진 대형 차이티야이다. 제26굴은 석굴 내부 깊이가 20m이며, 28개의 열주가 있다. 스투파에 감실을 만들고 불상 조각하였는데, 스투파 앞면의 사당형 감실에도 불상 조각하였으며, 열주 상부 이마돌에도 정교한 부조 조각이 있다. 좌측 측량 입구부분에 7m의
열반불이 조각되어 있다.

 

아잔타의 벽화는 짚이나 동물의 털과 혼합된 진흙이나 소똥으로 바탕을 처리하고, 바탕 위에 백토나 석회를 입혀 면을 다듬었다. 구도와 밑그림은 진홍색, 바탕은 녹토색이며 채색 후 광택을 냈다.

 

제 1석굴은 주랑, 현관, 다주실 홀을 이용한 14개의 승방이 있는데, 5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처의 전생인 마하자나카 왕자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왕과 왕비 앞에서 여성 무희들이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한다. 불당의 전실 입구 좌측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청연화관음보살의 그림이 있고, 우축에는 검은 피부에 보관을 쓴 금강수보살이 그려져 있다. 금강수보살 뒤에는 입방체 모양의 바위와 보살의 공덕을 찬양한 킨나라가 있으며, 천정에는 복합 당초문 벽화가 있다.

 

제 2석굴은 마야 여왕의 초상화로 화려한 천정에는 번영을 가져다주는 부부신인 판치카Panchika와 히라티Hirati가 있다.

 

제 16굴은 회랑 대신에 거대한 양각 부처상이 둘러진 좁은 복도가 있다. 부처의 이복 동생이 고행을 위해 아름다운 아내를 떠난다는 난다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아잔타 석굴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엘로라Ellora 석굴이 있다. 석굴 가운데 제 1~12굴은 불교 석굴, 제 13굴~29굴은 흰두교 석굴, 제 30~40굴은 자이나 석굴로 구성되어 있다.

 

 

7. 힌두교의 신

 

힌두교는 다양한 신앙과 사상들이 지속과 변화를 반복하면서 축적되고, 혼합된 종교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힌두 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혼란스러움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신적 존재들과 그것의 다양성이다. 그런데도 힌두교도들은 이처럼 수많은 신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신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힌두교의 주요 삼신 트리무르티Trimurti는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 이다.

 

트리무르티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세 개의 형상Three Forms”이란 의미다.
트리무르티의 교의에서는 우주의 창조·유지·파괴의 세 가지 우주적인 작용들이 창조의 작용을 하는 신인 브라흐마, 유지 또는 보존의 작용을 하는 신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 또는 변형의 작용을 하는 신인 시바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 가운데 브라흐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고, 비슈누와 시바가 힌두교의 2대 신으로 모셔졌다. 그리고 일부 토착 마을 여신들이 이들 남신의 배우자로 편입되거나 독자적인 신앙을 형성시킴으로써 힌두교의 3대 종파, 즉 비슈누파 Vaishnaviam, 시바파Shaivism 그리고 여신 신앙인 샥티파Shaktism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 종파의 구분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실제로 힌두 사원에 가면 여러 신들이 함께 모셔져 있고, 힌두교도들도 차별 없이 그들 모두에게 경배를 드린다. 인도에는 이들 다양한 신들에 대한 수많은 신화가 존재하고, 최근까지도 신과 신화를 만들어내는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힌두교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깊숙이 영향을 미쳐온 종교라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우리는 사원에서만 그들의 종교적 삶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도 그들의 신앙과 신화를 만날 수 있다.

 

트리무르티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양식은 세 신을 한 작품 안에서 개별로 표현하는 형태이지만 하나의 목 위에 세 머리가 있는 형태나 또는 하나의 머리에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세 얼굴이 있는 형태도 있다.

 

트리데비Tridevi는 트리데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세 여신들” 인데, 트리데비는 힌두교의 삼위일체신을 이루는 브라흐마·비슈누·시바의 배우자들을 결합하여 한 존재로 표현한 힌두교의 종교적 개념이다. 이 세 여신이 결합된 존재인 트리데비는 힌두교의 신성한 어머니라고도 불린다.

트리데비를 이루는 세 여신은 브라흐마의 배우자인 사라스와티, 비슈누의 배우자인 락슈미, 시바의 배우자인 파르바티이다. 사라스와티는 학문·예술 등의 문화적 성취를 주관하는 여신이며, 락슈미는 부·비옥함· 생식력 등의 물질적 성취의 여신이며, 파르바티는 영적인 힘·사랑 등의 영적 성취의 여신이다.

이 세 여신들 각자의 속성들은 창조자라고 불리는 브라흐마, 유지자 또는 보존자라고 불리는 비슈누, 파괴자로 불리는 시바의 속성과 각각 상응한다.

 

1)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학문과 예술의 여신 사라스와티

 

브라흐마는 창조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다. 브라흐마는 초기 우주창조 신화에 중요한 신으로 나타났지만, 6세기 이후에 그에 대한 숭배가 점점 약해져서 오늘날 인도 내에 그를 숭배하는 사원은 하나뿐일 정도로 브라흐마에 대한 독자적인 숭배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처럼 창조주의 위치가 약화된 것은 일단 창조가 끝나면 다음에는 성장과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유지와 해체의 기능을 담당하는 비슈누와 시바의 숭배는 커지고, 브라흐마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화나 그림에서 그의 형상은 네 방위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머리, 두 다리와 발, 네 팔과 손을 지닌 모습이다. 브라흐마의 네 개의 머리는 네베다, 네 카스트를 상징한다. 네 개의 팔에는 각각 꽃병, 활, 염주 그리고 리그베다 경전이 들려 있다. 모든 힌두교의 신들은 자신만의 탈 것을 가지고 있는데 브라흐마는 지식과 지혜의 상징인 거위 또는 백조인 함사Hamsa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브라흐마 신의 배우자 사라스와티는 학문, 음악, 예술의 신으로 공작을 타거나 연꽃 위에 우아하게 서서 손에는 악기와 염주 그리고 베다를 손에 쥐고 풍만한 몸과 여러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 예술의 여신 사라스와티는 베다 시대에는 강의 여신으로 정화와 풍요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후에 그녀의 본성과 기능이 변화하여 학문과 지혜의 여신이 되었다. 마츠야 푸라나에 나오는 신화에 의하면 브라흐마가 자신으로부터 사라스와티를 만들어 낸 후 창조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창조신 브라흐마의 구애를 받아들여 인간의 조상 마누를 낳았다고 한다. 그 후 마누는 오랜 고행 끝에 브라흐마에 버금가는 창조의 힘을 가져 인간을 창조해 냈다.

 

2) 유지와 보존의 신 비슈누와 락슈미

 

우주의 보존과 유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비슈누는 세상의 질서이자 정의인 다르마를 방어하고 인류를 보호하는 신으로 힌두 신들 가운데 가장 자비롭고 선한 신으로 묘사된다. 비슈누는 인간이 위험에 처하게 될 때마다 아바타르Avatar로 나타나서 세상을 구원하는 정의로운 역할을 담당한다.

비슈누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은 네 손에 소라, 원반, 철퇴, 연꽃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소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근원이자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고, 원반은 우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악마들의 머리를 베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사용된다. 연꽃은 정결함과 평화와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철퇴는 원초적 지식을 상징한다. 또 다른 비슈누의 묘사는 대양 위에 떠 있는 뱀 위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이다.

 

 

 

 

 

데오가르Deoghar의 비슈누 사원 남벽에는 찰루키아(6세기 초반) 왕조의 힌두교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의 성실 남벽 중앙에는 비슈누신이 7마리 큰 뱀인 나가의 몸통을 침대 삼아 누워 끝없는 잠에 잠겨 있다. 앞 쪽에는 그의 부인 락슈미가 종아리를 만지며 마주 보고 있으며, 비슈누의 배꼽에서 홀연히 연꽃 줄기가 나와 다시 창조가 일어나고, 이 연꽃 위에서 브라만이 나타나 다시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 우측에 황소를 탄 시바와 코끼리를 탄 인드라, 공작을 탄 아들 스칸다가 있다.

 

비슈누의 탈 것은 독수리 형상을 하고 있는 가루다Garuda이다.

 

락슈미는 비슈누의 배우자로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신 가운데 하나로 정숙함과 미를 표상하고,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된다. 락슈미의 주요 기능은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락슈미는 모든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대상이지만 특히 상인계층이 주요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어 그들의 축제인 디왈리 때 특별히 숭배된다.

락슈미는 보통 두 팔(또는 네 팔)을 지니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형상화된다. 팔이 둘인 경우 양손에 부를 상징하는 연꽃을 들고 있고, 팔이 넷인 경우는 양손에는 연꽃, 아래로 편 손으로는 금화를 쏟아 붓고 있다. 독자적인 사원은 없지만 많은 사원에서 비슈누의 배우자로 함께 나타난다.

 

비슈누는 다양한 아바타르Avatar로 나타난다. 아바타르Avatar 사상은 신의 화신Incarnation 개념으로 힌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상은 비슈누, 시바 그리고 주요 여신들 모두와 관련되지만 특히 유지와 보존의 기능을 담당하는 신인 비슈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힌두 신화에 따르면 지상의 진리와 질서가 오염되거나 쇠퇴될 때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지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비슈누의 대표적 아바타르는 마츠야, 쿠르마, 바라하, 나라심하, 파라슈라마, 발라라마, 라마, 크리슈나, 붓다, 칼키 등이다.

 

첫 번째 화신 마츠야는 큰 물고기로 브라흐마나의 홍수신화와 관련이 있다. 인류의 시조인 마누가 물고기로부터 조만간 발생하게 될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말대로 큰 홍수가 났다. 마누는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큰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하였다. 세상을 삼켰던 물이 빠진 뒤에 마누는 산에서 내려와 제사를 지내고 다시 인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신화로서 물고기가 마누를 구제한다는 이 홍수신화는 서사시나 푸라나에 전수되어 결국 비슈누의 화신이 되었다.

 

두 번째 화신 쿠르마Kurma는 거북이이다. 그 기원은 프라자파티가 거북이의 모습으로 세계 창조를 하였다는 브라흐마나의 신화이다. 푸라나에 의하면 세계가 파멸할 때, 큰 홍수가 나서 신들은 많은 보물을 잃어 버렸다. 이 때 비슈누 거북이가 되어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그의 등에 만다라Mandara 산을 짊어지고 대지를 지탱하였다. 그리고 악마의 신들로 하여금 바다를 휘젓도록 하였다. 이처럼 비슈누는 거북이로 변신하여 신들이 우유의 바다로부터 만들어 낸 아므리타Amrta(불사약) 등의 여러 귀한 물건을 휘젓는 일에 일조했다.

 

세 번째 화신 바라하Varaha는 멧돼지 화신이다. 악마 히란냐약샤가 대지를 바다 밑으로 침몰 시켰을 때 1000년 동안의 끈질긴 싸움 끝에 대지를 그의 이빨로 물고 다시 끌러 올렸다. 이처럼 대지를 지탱하여 인류를 구제했다고 한다. 이 멧돼지의 전설은 브라흐마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원주민의 동물 숭배를 통하여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머리가 멧돼지로서 왼쪽 겨드랑이에 대지를 나타내는 여성을 끼고 있고, 양발로 용과 거북이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네 번째 화신 나라심하Nrshinha는 절반은 인간, 절반은 사자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악마 리란니야카시푸를 퇴치하는 비슈누를 나타낸다. 브라흐마의 은총에 의해 신, 인간, 야생동물의 어느 것에도 살해되지 않는 힘을 부여받은 이 악마는 그의 아들 프라흘라다가 비슈누를 신앙한다고 하여 아들을 죽이고자 한다. 이때 비쉬누 신이 절반은 사람 절반은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악마를 가볍게 퇴치해 버렸다. 이 악마는 라바나로 재생했다고 한다.

 

다섯 번째 화신 바마나Vamana는 난장이이다. 이 화신도 앞의 네 화신과 같이 우주의 창조와 관련하여 분류할 수 있고 우주의 제2기 유지기에 악마 발리가 삼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 때 비슈누는 난장이가 되어 나타나서 발리에게 세 걸음만큼의 땅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힘을 과신한 발리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왜소한 난장이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하여 세 걸음을 걸었으며 그의 세 걸음으로 인해 우주의 삼계가 창조되었다. 이것이 브라흐마나를 거쳐 서사시와 푸라나에 이르러 그가 비슈누의 다섯 번째 화신이 된 것이다.

 

여섯 번째 화신은 파라슈라마Parasrama(용사)이다. 파라슈라마는 도끼를 가진 라마라는 뜻으로 그는 도끼를 휘둘러서 교만한 왕족을 넘어뜨리고 브라만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우주의 제2기 유지기에 비슈누는 브라만인 자마드아그니의 아들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샤트리아의 카르타비르야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그는 도끼를 휘둘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크샤트리야족을 완전히 멸한 파라슈라마는 마헨드라산의 숲으로 고행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는 아슈바메다를 거행하고 모든 땅을 카시야파에게 돌려준다.

 

일곱 번째 화신은 라마Rama이다. 라마는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Ramayana 중에서 라마야나의 주인공으로서 마왕 라바나Ravana를 죽인 영웅이다. 이 서사시에서는 라마의 출생 이야기를 통해 라마가 비슈누의 화신임을 나타낸다. 이에 따르면 아요디야Ayodhya 왕국의 다샤라타Dasaratha 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마땅치 않아서 자식의 탄생을 기원하는 말의 희생제를 지냈다. 이때 천계에서는 온갖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 악마왕 라바나를 퇴치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브라흐마 신의 은총으로써 불사신이 된 라바나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비슈누는 다샤라타 왕의 아들 라마의 모습으로 이 지상에 나타난다.

이 땅의 화신으로 등장한 라마는 어린시절부터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걷다가 결국 악마인 라바나와 일대 격전을 벌여서 결국 물리치고 선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화려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마는 인도사람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영웅이자 신이기에 그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다.

 

여덟 번째 화신은 크리슈나Krishina이다. 크리슈나는 신성한 사랑의 상징이며, 10 아바타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신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강조하는 수많은 종파들이 크리슈나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문학, 음악, 회화 등의 분야에서 풍부한 종교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소년 크리슈나는 주로 짓궂은 장난으로 유명하지만, 많은 기적도 행했으며 악마들을 죽이기도 했다. 청년 목동 크리슈나는 연인으로 알려져, 목동의 아내와 딸들은 그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 집에서 나와 숲속의 그에게로 달려가 함께 열광적으로 춤추곤 했다. 그러한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라다가 특히 크리슈나의 사랑을 받았다. 목동 크리슈나는 인드라 신을 섬기는 베다 중심의 종교에서 갈라져 나온 목축 부족의 신이었다.

크리슈나에 대한 숭배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신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유사점 추구이다. 예컨대 청년 크리슈나와 여인들의 유희는 신과 인간의 영혼 간에 존재하는 사랑의 교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크리슈나의 생애와 관련된 수많은 전설은 회화와 조각을 통해 풍요롭게 표현되었다. 소년 크리슈나는 팔과 무릎으로 기어가거나 버터 한 덩이를 손에 들고 기쁨에 넘쳐 춤추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크리슈나의 모습은 청년 크리슈나가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17, 18세기의 라자스탄과 파하르 지방의 회화에서는 크리슈나가 검푸른 피부 위에 노란색 도티(허리를 감싸는 인도 고유 의상)를 걸치고 공작새 깃털로 만든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 되고 있다.

 

아홉 번째 화신은 붓다Buddha이다. 힌두교에서 불교가 더 이상 특별한 어떤 종교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되자 불교를 자신들의 주신인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삼았으며 이것은 불교가 힌두교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불교가 힌두교의 사상의 뿌리와 그리 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열 번째 화신은 칼키Kalki이다. 암흑의 시대인 파괴기가 끝날 무렵에 손에 불 칼을 들고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미래의 화신이다. 그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며 생성기의 법에 따르는 자를 구원한다고 하는 신이다. 결국 칼키는 현상태로서의 우주의 파괴기에 나타나 자신 속에 모든 선을 거두어들인 후 다음 단계의 우주 생성기가 될 때 다시 선과 질서를 우주에 펼쳐 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

 

 

3)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와 그의 가족

 

시바는 비슈누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이고 숭배 받는 신이다. 시바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 신으로 때로는 파괴적이면서 때로는 창조적이고,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금욕적이면서도 에로틱한 면모를 지닌 신이다. 힌두교의 순환적인 시간 개념에 의하면 모든 창조되어진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 바로 그 해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 시바신 이다. 따라서 힌두 신화에서는 파괴나 해체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인도인들 에게 육신의 해체인 죽음이 곧 다른 새로운 삶으로 전이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체, 파괴되는 모든 것은 다시 창조된다고 믿는다.

 

시바는 신상뿐만 아니라 링가Limga라 불리는 돌기둥으로도 숭배되고 있다. 이 링가는 우주의 모체 또는 근원적 생명력으로서의 시바를 상징한다. 일부 학자들은 링가가 본래 토착신앙에서 생식력을 상징하는 남근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시바는 파괴를 상징하는 신이자 재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신이며,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특징을 지닌 신이기도 하다. 또한 시바는 히말라야 산 정상에서 세속을 초월한 체 요가와 명상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대다수 사원과 성소에서 보게 되는 링가는 미끈한 표면에 아무 조각도 새기지 않은 질박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일부 링가에는 시바의 무카mukha(인간과 같은 얼굴)가 부조되기도 한다.

 

시바 링가는 시바 신의 화신으로 숭배되고 또한 신의 양면성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시바 신은 고행, 극기, 요가를 담당하는 신이기도 하지만 주로 관능과 성적 욕정의 상징인 남근상으로도 숭배된다. 링가는 창조를 위하여 언제나 발기해 있지만 시바 신은 결코 쉽게 사정하지 않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 양극에 있는 것의 결합을 성적 이미지로 설명한 탄트라 운동이 나타나기 전부터 링가는 여성기 또는 여성성의 상징인 요니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표현되었다. 링가와 요니는 남성과 여성, 하늘과 땅의 결합을 의미하고, 존재의 전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링가는 둥근 원통형의 석주와 그 상대적인 존재인 여성기를 의미하는 원형의 요니 중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남녀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입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링가 이외에 시바의 대표적인 상징은 춤의 왕 나타라자이다. 나타라자 상은 네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를 갖고 역동적인 춤동작을 하고 있다. 그는 춤을 통해 자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며, 동시에 영원한 에너지에 대한 현현을 묘사한다. 특히 남인도 일대에서 시바는 춤의 왕 시바 나타라자로 숭배된다.

인도의 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쉬바의 춤은 종교나 예술에서 표현될 수 있는 신의 활동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뛰어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시바의 춤은 힌두 전통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남인도에서 만든 시바 춤 청동상에는 오른쪽 위의 손은 작은 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리듬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계시, 전승, 주문, 주술, 신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인 소리를 뜻한다. 또한 이 소리는 태초의 우주 발생적 힘 속에 있는 절대자의 생산적 에너지인 최초의 진리를 잉태한 창조의 순간을 의미한다. 왼쪽 윗손의 손가락은 반달모양을 취하고, 손바닥 위에는 불길을 가지고 있다. 불은 세상을 파괴하는 요소이다. 암흑의 시대가 끝날 때 불은 창조의 몸체를 파괴하고 자신도 꺼져 버린다.

오른쪽 아래 손은 보호와 평화의 의미로서 “두려워 말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왼쪽 아래 손은 가슴으로 비껴 올려 쳐들고 있는 발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발은 해방 또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 손은 코끼리의 길게 뻗은 코 또는 ‘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바의 아들로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가네샤를 연상시킨다. 불꽃과 빛의 고리가 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을 둘러싼다. 이것은 그 속의 춤추는 신에 의해 움직여진 자연의 춤, 즉 우주의 역동적인 과정과 그것의 피조물들을 의미한다.

 

시바는 수소를 바하나Vahana(탈 것)로 삼는다. 대부분의 시바 사원은 등에 혹이 난 흰 수소가 높은 단 위에 기대어 사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상을 갖고 있다. 힌두 사상에 따르면 이러한 수소는 링가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영원히 시바 신을 응시하고 있다고 한다. 난디는 시바 신의 주요 시종 중의 하나로 간주되며, 소의 얼굴을 한 난쟁이로 조각되기도 한다. 인도 남부의 여러 시바 사원의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인간 모습의 황소 조각은 곧잘 신으로 오인된다. 3개의 눈, 엉킨 머리타래 속의 초승달, 전투용 도끼와 영양을 잡은 두 팔을 포함한 4개의 팔이 있는 도상학적 모습이 전형적인 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개 예배하듯이 4개의 팔을 굽힌 모습이 특징적이다. 현대 인도에서 소를 숭배하는 것은 시바 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 북부 바나라시와 같은 힌두교의 신성한 도시에서는 특정한 소들을 풀어놓고 거리를 마음대로 지나다니게 한다. 이 소들은 시바 신에게 속한다고 생각하여 옆구리에 시바 신의 삼지창 낙인을 찍는다.

 

시바의 배우자 신인 파르바티는 힌두교의 삼위일체신 시바의 배우자이며, 트리데비 Tridevi를 이루는 세 여신들 중 하나이다. 힌두교에서 파르바티는 최고 여신인 마하데비의 부드러운 측면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자 또는 변형시키는 자라고 불리는 시바의 부인이며 샥티 그 자체인 것으로 여겨진다. 파르바티는 때때로 지고하고 신성한 어머니로 여겨져서 모든 다른 여신들은 파르바티의 화신이나 화현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파르바티는 명목상으로 파괴와 재생의 신인 시바의 두 번째 배우자이다. 그러나 파르바티는 시바의 첫 번째 배우자인 사티가 재 화신 또는 윤회한 것이기 때문에 사티와 파르바티는 사실상 동일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파르바티는 힌두교의 남신 가네샤의 어머니이며, 히말라야의 딸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바와 함께 있을 때는 파르바티는 두 팔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반면에 혼자 있을 때는 네 개 혹은 여덟 개의 팔을 가졌으며 호랑이나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대체로 파르바티는 인자하고 온화한 여신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파르바티는 카트야이이니Kathyayini, 마하가우리Mahagauri, 부바네스바리Bhuvaneshwari, 라리타Lalita 등의 여신들이 지닌, 인자하고 온화한 속성뿐만 아니라 두르가Durga, 칼리Kali, 시탈라 데비Shitala Devi, 찬디Chandi 등의 여신들이 지닌 무시무시한 분노의 속성도 함께 지닌 여신이다.

 

가네샤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로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시작의 신이자 장애를 제거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힌두교도들은 모든 예배나 의식, 새로운 사업의 시작, 여행, 집짓기 등과 같은 일을 시작할 때는 어김없이 가네샤 신에게 의식을 바친다. 오늘날 인도인들에게 널리 경배를 받는 신이 바로 가네샤 신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부와 명예를 축복해주는 가네샤를 숭배하는 사원도 많고 일반 가정집에서도 가네샤를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가네샤는 몸의 생김새에서 사람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자아내게 한다. 가네샤의 얼굴인 코끼리의 거대한 머리는 모든 영적인 지혜를 담고 있으며 그의 길고 굵은 코는 진리와 거짓을 식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상황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상징하며 튀어나온 배는 마음의 만족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가네샤는 신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몸집이지만 가장 작은 쥐 가자무카Gajamuka 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쥐는 욕망으로 흔들리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일정한 수행을 통해 영적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매개가 된다. 쥐와 가네샤의 몸의 크기의 대비는 유한한 마음과 무한한 영적 지혜의 대비로 상징된다.

 

두르가는 인도 전역에서 여러 이름과 형태로 숭배되는데, 특히 북인도에서는 두르가란 명칭으로 숭배된다. 신화, 신상, 도상, 회화 등에서 이 여신의 형상은 열 개 이상의 손에 여러 무기를 들고 사자(또는 호랑이)를 타고 악마와 겨루는 강력한 여전사로 묘사되고 있다. 또 무시무시한 모습의 칼리와는 달리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힌두교도들은 두르가를 독자적인 사원이나 각 가정의 개별 신단에서 의례를 통해 숭배하고, 매년 가을에 두르가나 칼리 신앙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는 북인도와 벵갈의 여러 지역에서 9일간 행하는 두르가 푸자를 통해 여신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고 공동체적 단합을 다진다. 또 다른 형태인 칼리 여신은 인도 전역, 특히 서벵갈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숭배되는 강력한 신으로 여신 신앙인 샥티즘Shaktism의 주요 여신이자 탄트라의 신앙 대상이다. 벵갈 사람들에게 칼리는 어떤 목적으로도 숭배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빈부, 남녀노소, 카스트를 불문하고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칼리는 가장 일반적으로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검은 칼리인 닥쉬나칼리Dakshnakali 형태로 숭배되는데, 대개 검은 색으로 표현되는 칼리상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50개의 머리로 된 목걸이와 허리에 손 거들을 걸치고 있다. 또 세 개의 눈(과거, 현재, 미래)과 4개의 손을 가지고 있고, 누워 있는 시바 위에 서 있다. 신화에서 칼리는 두르가가 악마와 싸우면서 크게 분노했을 때 그녀의 이마에서 나타나 악마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강력한 여전사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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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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