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India/델리

[스크랩] 힌두교의 형성과 특징

arakims 2013. 11. 9. 12:23

.

 

 

힌두교의 형성과 특징1)

 

 

I. 힌두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힌두교의 개념

 

힌두교는 서구적인 관점,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교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의 주요 형성요소가 되는 특정 창시자나 공통된 교리 체계와 관행 또는 체계화된 종교 조직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공유하는 특정 경전 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힌두교는 오히려 단일한 신앙이나 행위 체계가 아닌 “힌두인들이 믿는 다양한 종교 형태들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그러한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통합성 속의 다양성 또는 다양성 속의 통합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관용성의 특성은 배제하기보다는 수용하려는 경향을 지닌 인도인의 속성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힌두인들 자신이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실 힌두교(Hinduism)란 말은 서구인들이 힌두인들의 종교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고 그에 대한 정의 역시 서구인들에 의해 시도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힌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사다나(Sadhana)’로 이해한다. 이 말은 “목표에 이르다, 목표를 달성하다”를 뜻하는 어근 사다(sadha)에서 나온 말로 “목표와 목표에 이르는 수단, 그리고 진리와 진리에 이르는 길” 모두를 의미한다. 즉 사다나는 “삶의 최고의 목표에 이르는 길” 또는 “그것을 달성하는(실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곧 바로 힌두교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 될수 있을 것이다. 그 목표란 바로 윤회(saṁsāra)로부터의 해탈(mukti 또는 mokśa)이다. 인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재 상황과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 고(苦)인 삶이 되풀이 되어 윤회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재생의 되풀이인 윤회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와 욕망 또는 집착 등으로 해서 하게 되는 행위, 즉 업(karma)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와 같이 윤회가 고(苦)로 파악되기 때문에 그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이 삶의 최고의 목표로 제시되게 된다. 따라서 힌두교는 “윤회로부터 해탈에 이르는 길” 또는 “진리”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힌두교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리고 그 것의 조화로운 공존을 하나의 통합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1) 이 글은 류경희. “힌두교의 역사.” 한국종교연구회 편. 『세계종교사입문』 (서울: 청년사, 2002)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2. 힌두교의 역사 개관 및 일반적 특성

 

힌두교의 역사는 기원전 30세기에서 기원전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더스 문명의 종교로부터 출발한다. 이 문명의 종교는 중세 이후 힌두교의 중요한 요소들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시된다. 이어 기원전 15세기 무렵, 인도 북서부로부터 인도로 이동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아 인들에 의해 이후의 힌두교가 주도적으로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리아 인들 종교의 여러 요소들이 비(非)아리아 인들의 요소들과 지속적으로 융합된 과정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크게는 슈루티(Śruti) 전통의 시기와 스므리티(Smṛti) 전통의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슈루티는 아리아 인들이 작성한 『베다(Veda)』 문헌에 대한 총칭이며 그에 근거한 종교 형태를 말하고, 스므리티는 『베다』 이후에 형성된 모든 종교 문헌들에 대한 총칭이며 그에 근거한 종교 형태를 지칭한다.

 

아리아인들의 초기 종교 형태는 최초의 『베다』서인 『리그베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현상을 신격화시킨 다신(多神) 숭배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브라마나』 문헌에 이르러서는 신들에 대한 숭배로서 행해지던 희생제의 자체가 신보다 더 중시되는 제의(祭儀) 중심적인 종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에 인도의 유명한 사회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약 기원전 9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우파니샤드』 문헌에 이르러서는 신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이전의 유신론 형태에서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모든 개별적 존재의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Ātman)을 동일시하는 일원론적 종교 형태로 세계관의 커다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이 일원론적 실재관에 근거한 인간관과 세계관 및 구원관은 이후 인도철학과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우파니샤드 종교는 힌두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시기에 힌두교의 주요 개념이며 불교를 통해 중국, 한국 및 일본 등에까지 전파된 업과 윤회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생이 되풀이되는 이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최고의 종교적 목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에 슈루티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강력하게 도전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유물론사상, 자이나교 그리고 불교 등이 그들이다. 이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 슈루티 전통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아리아적인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대중들의 종교 요소들을 수용하여 기원전 2세기경부터 스스로를 재정립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스므리티 전통이다. 흔히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힌두교는 이를 지칭하기도 한다.

 

스므리티 전통에 속하는 힌두교의 종교 형태들에서 몇 가지 새롭고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슈누(Viṣṇu)와 쉬바(Śiva) 신이 중심이 되는 유신론의 재등장이다. 이에 따라 이들 인격신들에 대한 숭배 형태인 박티(bhakti)가 발전되었다.
또한 추구해야 할 여러 종교적 가치들을 종합시키는 성격을 띠어서 종교적 가치인 목샤(mokśa), 즉 해탈의 추구와 사회적 가치인 다르마(dharma)의 추구 사이에 상호 모순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삶의 4단계, 카스트의 준수, 삶의 4가지 목적 등의 종교사회적인 의무 규정이 확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구원의 방법 역시 행위의 길(Karma-marga), 지혜의 길(Jňāna-marga) 그리고 신애의 길(Bhakti-marga) 등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주요 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2세기 무렵부터 신학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는 종파로 발전하게 되는데, 주요한 것으로는 비슈누 신앙, 쉬바 신앙 그리고 여신 숭배인 샥티 신앙 등을 들 수 있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기독교 및 서구 문화와의 만남은 힌두교에 제2의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슬람의 영향은 특히 두드러져서 많은 힌두교도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무렵에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주요 특성을 결합시켜 시크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켰고, 힌두교 내에서는 박티 요
소가 더욱 발전되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서구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인도인들에 의해 힌두교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브라모 사마즈(Brāhmo Samāj), 아리아 사마즈(Ārya Samāj), 신지회(神智會 Theosophy), 라마크리슈나 미션(Rāmakrishna Mission) 등 새로운 종교 운동들과 마하트마 간디, 라마크리슈나, 비베카난다, 오로빈도 등의 종교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힌두교를 서구뿐 아니라 전 세계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II. 우파니샤드: 슈루티 전통의 정통 브라만교

 

1. 우파니샤드 문헌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형식주의에 치우친 무의미한 희생 제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 종교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게 되는 『우파니샤드』 문헌의 등장이다. 『우파니샤드』 문헌은 약 500여 년(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에 걸쳐 쓰여진 2백여 권에 달하는 사색서로 그 저자나 사상의 전개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전 『베다』의 이원론적 세계관과는 전혀 상반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Monism 또는 Non-dualism)의 제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upa-ni-ṣad)라는 말의 뜻은 (어떤 신성하고 은밀한 가르침을 스승에게서 듣기 위해) “가까이 앉다”이다. 그리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높은 카스트에 속하는, 훈련이 잘된 아들이나 남자 제자에게만 알려주는 은밀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상당 부분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2. 우파니샤드의 토대가 되는 전제들

 

우파니샤드 성자들은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색의 과정을 거쳐 다음과 같은 신비로운 지식을 깨닫게 되었다. 즉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고통은 삶이 되풀이 해서 재생되는 윤회(saṁsāra)를 통해 지속된다. 따라서 윤회는 죽음의 두려움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이 된다. 그런데 이 윤회는 인간이 우주와 인간 자신의 참 실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avidyā)로 인해 비롯된다. 그렇다면 실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계의 다양성 배후에는 하나의 실재인 브라만이 존재하는데 그 브라만은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비인격적인 실재로서 자기분화 작업을 통하여 현상계의 다양성을 낳았다. 그러므로 모든 개별 존재의 참 본질인 아트만은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과 동일하며 현상계에 나타나는 다양성과 차이는 이름과 형태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윤회는 바로 이 참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나타난 현상을 진정한 실재라고 착각하는 무지로 인해 쌓게 되는 업(karma)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실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근거가 되는 업을 없애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파니샤드의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 전제에 나타나는 주요 개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브라만: 다양성에서 통합성으로의 전환

 

우파니샤드의 성자들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가장 우선되는 관심은 고통의 원인을 밝혀내는 데 있었다. 그들은 현상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하면서도 서로 상반되는 요소들, 예를 들면 남과 여, 낮과 밤,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삶과 죽음 등등이 전연 별개의 본질을 갖는 실재들일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은 현상계를 구분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현상계의 모순과 불일치를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고통의 문제를 해결
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일원론적인 실재관이고 그것의 핵심 개념이 바로 브라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브라만은 나타난 모든 존재와 현상들의 궁극적이며 비인격적인 근원이자 원리로서 모든 것의 존재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통합적인 모체이다. 그렇다면 분화되지 않은 통합체인 이 하나의 존재로부터 현상계의 다양성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의 자기분화 작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브라만이 스스로 많은 것이 되고자 갈망해서 고행을 행하고 스스로를 많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전 세상을 낳은 후 그는 그 속으로 들어 갔다. 그러므로 브라만은 모든 존재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각 개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숭배의 대상이거나 인식의 대상일 수가 없다. 그것은 깨달음과 실현의 대상인 비인격적인 실재로서 어떠한 형태나 속성도 지니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유일신 종교체계의 창조신인 야훼(Yahweh)나 알라(Allah)의 속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찬도갸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개별적인 존재나 현상들간의 차이는 형태와 명칭의 차이일 뿐이고 그들의 본질은 모두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브라만이다.

 

2) 아트만: 대상세계로부터 인간 내부세계로의 관심의 이동

 

이제 우파니샤드 성자들의 관심은 다양한 자연 현상이 지니는 자연력을 신격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위대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양시키는 데 있었다. 이것은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자아와 우주를 동일시하는 우파니샤드의 이 핵심 사상은 『찬도갸 우파니샤드』6장에 나오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현상계와 우주의 모든 신비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이 사유는 인간에 중심을 두는 종교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아트만은 “숨쉬다”라는 뜻의 어근 안(an)에서 나왔고 아트(at)는 “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트만은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영혼과 자아의 의미로 확대되어 보편적이며 불멸하는, 모든 개체의 진정한 자아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아트만이 우주적 자아인 브라만과 같으므로 인간은 소우주로서의 자신을 앎으로써 대우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트만에 대한 이 견해는 자아의 네 상태를 통해 설명된다.

 

(1) 깨어 있는 상태

삶의 실제적인 목적에 유용하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는 이원성의 특성을 지니므로 본질적인 자아가 아니다.

 

(2) 꿈꾸는 상태
깨어 있는 상태의 경험을 반복하므로 주ㆍ객의 구분상태가 유지된다. 이 상태에서 많은 것을 창조해내는 자아의 창조성이 나타난다. 즉 브라만이기도 한 아트만은 자기 분화를 하는 실재이고 몸과는 독립적이다.

 

(3)꿈 없는 잠의 상태
주ㆍ객의 이원성이 극복되는 상태이다. 꿈꾸지 않고 잠자는 상태에서 인간은 브라만을 실현하는 상태를 미리 맛볼 수 있다. 이 상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지는 상태이며 선과 악을 벗어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완전한 해탈의 상태라고 볼 수 없다. 그리하여 후기 우파니샤드 성자들은 투리야 아바스타(Turiyaavastha)라는 네 번째 상태를 생각해내게 되었다.

 

(4) 투리야아바스타 상태
명상과 요가 수행을 통해 모든 대상을 마음에서 비워버림으로써 자발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상태로, 모든 구분의식이 사라지는 통합된 순수의식 상태이다.

 

3) 목샤: 물질에서 정신에로의 강조점의 이동

 

위의 네 번째 상태가 바로 우파니샤드의 궁극적인 추구점인 목샤, 즉 해탈의 상태이다.
인간은 모든 것의 가장 깊은 내부에 있는 아트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만과 같다는 브라만 지식(Jňāna)을 달성함으로써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단순한 지적인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영적인 해탈의 수단으로서,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실현의 문제이다.

지속적인 명상과 요가 수행을 통해 목샤를 달성하게 되면 모든 감각적인 욕망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고 분화되지 않은 순수한 의식 상태에 이르게 됨으로써 과거의 모든 업이 소멸되고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브라만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동기는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해탈에 이른 사람이 브라만 실현 이후에도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도 있으나 그는 고통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후 목샤는 힌두교에서 최고의 종교적 목표가 되었다.

 

4) 업과 윤회

 

우파니샤드 성자들은 현상계의 다양성 배후에 통합성이 존재하며 그 통합성이 바로 분화되지 않은 통합된 실재인 브라만이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깨닫지 못하고, 나타난 현상계를 진정한 실재라고 믿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는 한은 그의 모든 행위는 업 즉 카르마를 쌓게 되어 죽음과 재생을 되풀이하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가르쳤다.

 

“행하다”는 뜻의 카르(kar)에서 유래된 카르마는 행위로 인하여 초래되는 우주적인 인과관계의 원리로 그 기원을 아리아인들 이전의 인도 토착 종교에 두기도 하나 『샤타파타 브라마나』에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만들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라고 처음으로 설명되고 있고 『우파니샤드』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이후 인도의 종교와 철학 체계의 근본 개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카르마는 행위, 운명, 인과관계, 효과, 생산 그리고 결과 등의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업 사상은 『리그베다』에 나타나는 우주의 엄격한 질서 개념인 ‘리타’에 뿌리를 둔다고 추정되며 세계의 질서가 엄격한 인과율에 의해 지배된다는 전제에 근거된다. 즉 우주와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엄격한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고이다.

따라서 개인이 행한 어떠한 행위이든 그 배후에 그 행위의 선과 악에 따라 미래에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어떤 효능을 남기기 때문에 그 행위의 결과가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행위자는 다음 생에 태어나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경험해야만 한다는 믿음이다. 즉 인간의 행위는 반드시 결
실을 맺는 뿌려진 씨앗과 같다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냉엄한 도덕률인 업 개념과 관련되어 발전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바로 윤회 개념이다. 윤회 또는 재생 개념은 세계 여러 곳의 원시종교 형태에서도 쉽게 발견되므로 인도 종교에 독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업 사상과 관련된 윤회 사상은 인도 종교에 독특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인도의 윤회사상은 『우파니샤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또 체계화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윤회사상은 『우파니샤드』의 다음과 같은 구절, 즉 “선행을 한 사람은 선하게 태어나고 악행자는 악하게 태어난다.” 또는 “선한 이의 영혼은 선한 사람의 자궁으로, 악한 사람의 영혼은 악한 이의 자궁으로 들어간다.”"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의 선과 악의 행위에 따라 그의 내생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내생의 형태는 인간만이 아니라 생체의 모든 형태가 가능하다. 이 내생의 결정은 엄격한 인과율이자 도덕률인 업의 법칙에 의한 자연적인 결과이지 유일신 종교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죄에 대한 벌의 형태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생의 윤회에는 심판하는 신이나, 최후의 심판, 참회, 속죄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5) 카스트 제도

 

업과 윤회 개념과 관련해서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카스트(Caste)로 불리는, 인도 사회의 엄격한 사회계급 제도이다. 이 힌두 사회 구조는 인도에 독특하고도 고유한 사회 제도로서 이에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이론이 바로 업과 윤회 이론이다. 이 제도는 인도 사회의 구성원들을 직업의 전문성 또는 출생에 따라 네 계급, 즉 사제나 학자인 브라만(Brahman) 계급, 무사나 통치자인 크샤트리야(Kṣatriya) 계급, 농업이나 상업 또는 공업에 종사하는 바이샤(Vaiśya) 그리고 이 세 계층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노예계급인 슈드라(Śūdra)로 구분하는, 위계질서가 있고 매우 폐쇄적인 사회제도이다.

위의 세 계층에게만이『베다』의 연구가 허용되고, 또 참여자가 상징적으로 재생(再生)되는 베다의 입문식이 허용되므로 그들을 몸으로 한 번 태어나고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다시 태어난 재생계급 즉 드비자(Dvija, twice-born)로 부른다. 그리고 이들 계급만이 최고의 종교적 가치인 해탈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으며, 슈드라와 어떤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인 하리쟌(Harijan)은 위의 모든 경우에서 제외된다. 이들 각 계급에 부여된 의무와 지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이들 계급간에는 결혼, 직업, 음식 먹는 일, 의복 착용, 심지어는 접촉까지도 엄격히 제한된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는 매우 불평등하게 보이는 이 제도가 인도인들에게는 아무런 저항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업과 윤회 이론으로 제시된다. 즉 자신의 카스트는 결코 우연적인 사건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냉엄한 업의 법칙에 의해 자신이 이전에 행한 행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업과 윤회 사상을 믿는 인도인들은 자신의 현 위치와 조건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리그베다』 푸루샤 숙타에서 최초의 우주적 인간인 푸루샤가 희생 제물로 바쳐져서 그의 몸 각 부분으로부터 우주가 생성될 때, 그의 입에서 브라만이, 팔에서 크샤트리야가, 넓적다리에서 바이샤가 그리고 발에서 슈드라가 나왔다고 설명함으로써 사물의 시초부터 인류가 네 계급으로 나누어졌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때 가장 초기의 힌두 사회 구조는 정복민(Aryan)인 자유인 계급과 토착민(Dasa)인 노예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어 경직된 사회제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카스트 제도가 점차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우파니샤드 시기인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서이고 기원후 2∼4세기 무렵에 네 계급 구분이 잘 성립되어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회제도로 정착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카스트 제도의 목표는 사회의 안정 및 지속성의 유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진보의 개념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이 제도의 바로 이러한 성격이 한편으로는 인도 사회를 경직화시키고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오늘날 세속 국가로 변한 인도에서 이 카스트 제도의 문제는 인도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카스트 제도는 인도에서는 (피부) 빛깔을 의미하는 바르나(Varna)로 불리고, 이것이 보다 복잡한 하부 계급조직으로 분화된 것이 자티(Jati)이다.

 

 

III. 스므리티 전통의 후기 힌두교

 

1. 슈루티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후기 힌두교

 

슈루티 전통에서 다룬 『리그베다』, 『브라마나』 그리고 『우파니샤드』로 이어지는 아리아인들의 종교를 일반적으로는 정통 브라만교라고 부르는데, 이 브라만교의 사제들이 불교나 자이나교 등 새롭게 일기 시작한 종교 운동들의 도전에 대응하여 브라만교를 유지, 강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도는 정통 브라만교가 당시 인도 사회에 존재하던 다양한 집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한편으로는, 도전받고 있던 『베다』의 권위와 브라만교의 사회윤리 체계를 다시 세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아리아족 계통의 대중적인 신앙 요소들을 흡수함으로써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침입한 이후 지속되어온 아리아 문화와 비아리아 문화 간의 융합이 가장 두드러지게 이루어졌고 그리하여 대중에 기반을 두는 보다 포괄적인 종교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통 브라만교의 자기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 종교 형태가 바로 대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후기 힌두교이다. 이는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집성(기원전 2-3세기~기원 2-3세기)으로 나타났고 두드러진 신학적 발전은 서사시 말기인 기원 2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푸라나』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푸라나』 그리고 『다르마 샤스트라』와 『탄트라』 등 『베다』 이후에 나타난 종교 문헌들을 총칭해서 스므리티라 부른다.

 

이 스므리티 전통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고 카스트의 준수 등 종교ㆍ사회적인 의무인 다르마를 중시한다든가 또는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목샤를 최고의 종교 목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슈루티 전통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변화들을 경험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변화들을 지적해본다면,

첫째는 쉬바나 비슈누 등 『리그베다』에서는 거의 중시되지 않던 인격신들이 주요 신으로 등장하고 이들이『우파니샤드』의 비인격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인 브라만의 인격화로 설명되게 된 점이다. 그리고 이들 신들에 대한 숭배 행위로서 ‘박티’ 행위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둘째로는 인도인들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추구하는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길로, 명상과 요가 수행을 통해 신비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우파니샤드의 지혜에 의한 길만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 즉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하는 행위에 의한 해탈의 길인 행위에 의한 길, 그리고 앞서 주요 신들에 대해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행위인 박티에 의한 길 등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동등한 방법으로 제시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생활 규범으로서의 사회윤리 체계를 재확립시키려는 시도로서 종교적 가치인 목샤의 추구와 사회적 가치인 다르마 준수 간의 긴장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르
나 아슈라마 다르마(Varṇa-āśrama-Dharma) 교리의 등장이다.

이들 주요 변화를 중심으로해서 후기 힌두교의 특성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바가바드기타의 종교 : 종합의 종교

 

스므리티 전통은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형성으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영웅 라마(Rama)에 대한 이야기인 『라마야나』가 인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또 그 영향력 역시 크다고 할 수 있으나, 후기 힌두교와 관련해서 보다 중요성을 띠는 문헌은 『마하바라타』이다. 그 까닭은 힌두교의 종교 문헌 가운데 오늘날 가장 사랑받고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바가바드기타』가 그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가바드기타』는 후기 힌두교가 지니는 두드러진 특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힌두교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Mahā) 바라타(Bhārata)’는 ‘위대한 인디아’를 뜻하는 말로 바라타, 즉 인디아라고 불리는 신화적인 영웅의 후손들인 판다바(Pāṇḍava)족과 카우라바(Kaurava)족 간에 왕권의 계승을 다투는 전쟁 이야기이다.

이 서사시는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ㆍ악 세력간의 투쟁을 상징화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바가바드기타』는 바로 이 작품의 23장에서 40장에 걸쳐 실려 있는 부분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작성되었고, 그 후 많은 수정과 개작을 거쳐 기원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최종 수정본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쓰여진 시기, 저자에 따라 강조점의 차이가 나타나고 서로 모순되는 점까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 밑에 깔려 있는 정신이 종합과 통합의 정신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호 모순되는 요소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기타』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파니샤드의 비인격적인 일원론과 바가바타파의 유신론의 결함, 그리고 사회와 세상의 유지를 지향하는 다
르마의 준수와 세상으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목샤의 추구 등 서로 상충되는 실재관과 가치를 결합시키고 있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는 길, 즉 구원의 방법 역시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상호 모순성을 내포하는 여러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바로 서로 상반되는 이러한 요소들을 통합의 관점에서 조화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기타』의 특징이다. 이는 결국『기타』가 다양한 종교 형태를 결합시킨 스므리티 전통의 대표적인 문헌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슈누 신과 쉬바 신의 등장: 브라만과 이슈바라

 

스므리티 전통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리그베다』에서 거의 중시되지 않던 비슈누 신과 쉬바 신이 주요 숭배 대상으로 등장한 것인데, 이들은 우파니샤드의 비인격적 실재인 브라만이 구체적인 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된다.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는 신들로는 비슈누와 그의 아바타라(avatāra 化身)로 믿어지는『기타』의 크리슈나, 또 모순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쉬바 신, 그리고 비슈누나 쉬바의 배우자들인 여신들을 들 수 있는데, 바로 이들 인격신들에 대한 박티 숭배가 대중들의 지배
적인 종교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슈누나 쉬바는 브라만이 숭배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속성과 형태를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구나(Saguṇa) 브라만으로 설명된다. 즉 그들은 사구나 브라만으로서 그의 에너지이자 본질인 프라크리티(Prakṛti)로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또 그것을 파괴하는 전 우주의 지배자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비슈누가 세상과 우주의 유지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쉬바가 파괴의 기능을 담당하며, 이에 덧붙여 브라마(Brahma)라고 하는 신이 창조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를 트리무르티(Trimurti)라 부르며 이의 구체적인 상징으로서 거대한 돌의 세 면에 이 세 신의 얼굴 모습이 조각된 상이 있다.

 

이 트리무르티는 가장 후기의 『우파니샤드』에서 처음 언급되나 『기타』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그 이후에도 별 중요성을 지니지 못해 그 상 역시 실제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듯하다. 이는 브라마가 창조의 신으로 인식되기는 하나 대중들 사이에서는 널리 숭배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실제로 그의 사원은 인도 전역에 걸쳐 둘뿐이다. 한편 그의 부인 중 사라스바티(Sarasvati)는 학문과 지혜의 여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브라마와는 달리 비슈누와 쉬바 신은 후기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숭배 대상이다. 이들 두 신, 특히 쉬바는 『리그베다』에서 별다른 중요성을 지니지 못하는 신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바쳐지는 찬가는 수도 아주 적었다. 그러나 서사시에 이르러서 인드라, 아그니, 소마 등 『리그베다』의 주요 신들이 중요성을 상실하고 비슈누와 쉬바가 최고의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 비슈누

 

비슈누(Visnu)라는 이름은 ‘널리 퍼지다’, ‘충만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어근 비스(vīṣ)에서 유래했는데 그가 비아리아적인 특징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 토착민들이 숭배하던 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리그베다』에서 악한 힘들과 싸우는 인드라와 관련해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신으로 나타나고 『브라마나』에서는 신들 가운데 행운을 가장 많이 가져다주는 신으로 표현된다. 그 후 점차 중요성을 띠게 되어 마하바라타 시기에 이르면 최고의 신이며 우주의 유지자로서 나타난다. 그는 힌두교의 신들 가운데 가장 자비롭고 선한 신으로 물과 밀접히 관련되어진다. 따라서 그는 『푸라나』에서는 원초적인 물과 관련된, 편재하는 신인 나라야나(Nārāyaṇa)로 언급된다. 갠지스 강이 신성시되는 이유는 갠지스 강의 물이 그의 발뒤꿈치로부터 흘러나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기에 이르러 그에게 사랑, 이로움 그리고 용서의 성격이 덧붙여져서 인류를 구원하는 신으로 믿게 되었다. 이는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이동하기 이전부터 있던 인도 원주민들의 다양한 구원 신화들이 비슈누의 신화에 흡수된 결과로 보이는데, 이들 대부분의 신화에서 그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나타난다. 비슈누의 이러한 특성이 체계화된 것이 『기타』에 나타나는 아바타라(avatāra, 내려온 자) 교리이다. 이 아바타라는 ‘내려옴’을 의미하는 말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우주와 세상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신으로서의 비슈누는 그의 숭배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또는 비슈누 신앙이 오염될 때 그 신앙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인간 또는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믿음이다. 전통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비슈누의 아바타라는 10가지로, 물고기인 마츠야(Matsya), 거북인 쿠르마(Kūrma), 곰인 바라하(Varāha),인간 사자인 나라심하(Narasiṁha), 난쟁이인 바마나(Vāmana), 파라슈라마(Paraśurama), 그리고 『라마야나』의 영웅인 라마(Rama)와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그리고 붓다이다. 끝으로 비슈누의 마지막 아바타라인 칼키(Kalki)는 어둠의 시대인 현재의 칼리 유가(Kali Yuga)가 끝날 때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 가운데 크리슈나가 가장 널리 숭배된다.

 

비슈누 신에 대한 숭배는 푸라나 시대에 이르러 종파의 성격을 지니게 되어 비슈누를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그가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로서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 행위를 모두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 종파로서의 비슈누 신앙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된다.

 

2) 쉬바

 

쉬바(Siva) 신은 후기 힌두교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널리 숭배되는 신으로 『리그베다』에서 쉬바라는 말은 신의 명칭이 아니라 단지 ‘상서로움’을 의미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그가 신의 명칭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때는 기원전 2세기부터이다. 그러나 쉬바와 유사한 속성을 갖는 신에 대한 숭배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형태 가운데 하나로, 쉬바 신의 원형이 인더스 문명에서부터 발견되고 『리그베다』의 루드라 신과도 관련된다.

 

쉬바는 매우 복합적이고 모순되는 성격을 소유한 신으로, 그 기능 역시 다양하다. 그는 자비롭고 이로운 속성을 갖는 비슈누와는 대조적이어서 두렵고 무서운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주의 해체력을 의인화시킨 파괴의 신으로 유명하고 생명체를 죽여서 바치는 많은 제의들이 그의 숭배와 관련된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달리 창조력과 관련되는 재생의 신이기도 하다. 쉬바가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재생과 풍요의 기능을 지닌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에서 쉬바는 늘 곧추선 성기를 지니고 다니고 성적으로 자극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남근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링가(Linga)가 그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링가 상의 수는 쉬바 상의 수보다 훨씬 많고, 쉬바에 대한 숭배는 대개 이 링가 상에 바쳐진다. 쉬바는 또한 고행의 신인 마하요기(Mahāyogi, 위대한 요기)로도 유명해서, 그는 신화에서 세속적인 모든 욕망에서 초연한 채 해탈을 위해 요가 수행에만 몰두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세상의 창조나 유지의 성격과는 상반되는 파괴의 의미와도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쉬바는 상호 모순되는 속성들을 함께 지니고 있는 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상징인 나타라자(Nataraja, 춤의 왕)는 그의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 까닭은 그의 춤이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질서 잡힌 반복적인 움직임을 상징화시킨 춤이기 때문이다.

 

 

4.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

 

후기 힌두교의 대중적인 성격은 인격신들에 대한 숭배 형태에서도 나타났지만 인도인들의 최고의 종교적 목표인 해탈의 추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곧 해탈이 높은 카스트에 국한되어 있던 이전의 지식층 위주의 종교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해탈의 길이 개방되게 되는 대중의 종교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다양한 수행의 길들이 제시됐는데, 이것이 바로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인 지혜의 길, 신애의 길, 행위의 길 등이다.

 

1) 지혜의 길(Jňāna-marga)

 

스므리티 전통이 슈루티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후기 힌두교에서도 『우파니샤드』가 해탈의 길로 제시하고 있는 지혜의 길을 해탈을 얻는 가능한 길들 중의 하나로 받아 들인다.

 

이 지혜의 길은 『우파니샤드』에서 언급한 바 있는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초월적인 신비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에 이르려는 것으로 지식과 자기 수련을 중시하는 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명상과 요가가 중요한 수행 방법이 된다.

 

후기 힌두교가 이 지혜의 길을 해탈에 이르는 길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이 수행의 길이 카스트의 네 계급 가운데 앞의 세 계급에게만 허용되어 있어 슈드라 계층의 여성들이 제외되었고 또 그 신비 지식이 대다수 대중들이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지식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따르기는 힘든 수행의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혜의 길은 세속적인 삶에서 해탈하는 것에 최고의 강조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질서 유지의 측면을 결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기 힌두교는 행위의 길과 신애의 길 등 또 다른 수행의 길을 제시해줌으로써 사회질서 유지와 더불어 일반대중들이 해탈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2) 신애의 길(Bhakti-marga)

 

후기 힌두교에서 나타난 주요 변화 가운데 하나인 인격신들의 등장은 힌두교의 종교행위 형태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어, 이들 인격신에 대한 숭배 형태로서 박티, 즉 신에게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신애의 행위가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타』를 비롯한 스므리티 문헌에서는 박티가 지배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그만큼 박티는 후기 힌두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박티는 신에 대한 열렬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신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는 브라만의 구체적인 상징이라고 설명되는 신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용이한 해탈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수행의 길은 모든 계층, 특히 약하고 무지한 대중 계층에게 개방되어 있고 대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을 위한 해탈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박티(bhakti)란 말은 ‘봉헌하다’ 또는 ‘(신에게) 애착하다’라는 뜻의 바즈(bhaj)에서 유래 되었는데, 박티의 기원은 아리아족의 인도 이동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적인 종교운동 형태로서의 박티는 『기타』 시기(기원전 2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기원 3세기 이래 힌두교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특히 중세의 박티 운동은 이슬람의 영향으로 기원 7세기에 남부 인도에서 시작되어 15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북부까지 휩쓸게 되었다. 『기타』에 기술된 박티는 사회적인 의무의 준수와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두 가지 목적의 조화를 추구했으나 그 이후의 박티 운동은 신과의 정서적인 사랑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 박티는 힌두교가 자이나교와 불교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 끝내는 승리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도 힌두교를 재부흥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도 바로 이 박티였다. 그 까닭은 박티가 보다 용이하면서도, 철학적인 직관과 지식에 의한 수행의 길과 마찬가지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바가바드기타 4:38-39)이 대중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행위의 길(Karma-marga)

 

행위의 길은 올바른 행위, 즉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욕망 없이 행하는 행위를 통하여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수행의 길이다. 흔히는 종교 의례의 준수, 카스트의 준수, 그리고 삶의 네 단계를 거쳐 해탈을 추구하는 것 등 세상 유지의 측면이 강조되는 행위가 이에 속한다.
『기타』는 지혜의 길보다는 행위의 길과 신애의 길을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는『기타』가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지혜의 길을 거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혜의 길이 갖는 결함을 극복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기 힌두교에서 ‘행위’가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파니샤드의 경우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윤회의 근원인 업을 쌓는 것으로 이해되어 해탈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모든 행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행위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새로운 종교 상황 아래에서 육체적인 행위는 새로운 해석을 통해 긍정적으로 평가되게 되었다. 따라서 『기타』는 행위의 포기는 세상의 유지와 복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기타』가 바람직한 것으로 권하는 행위는 니스카마 카르마(niṣkama karma)이다. 이 니스카마 카르마, 즉 욕망 없는 행위는 이기심과 집착에서 자유롭고 실패나 성공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행위로 묘사된다(기타 18:17, 18:26).

『기타』에 의하면 행위로 인해 인간이 윤회의 굴레에 속박되게 되는 까닭은 행위의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 또는 욕망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버려야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 뒤에 놓여 있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포기가 아니라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한다(마하바라타 12:18,31).

 

이기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행하는 이 욕망 없는 행위가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욕망 없이 행하는 행위는 올바른 동기에 의하여 행해지는 행위로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사회적 의무의 실천을 의미한다.

즉 ① 세상의 모든 것 유지 (기타 3:24), ② 카스트의 아슈라마(āśrama, 삶의 네 단계) 의무의 준수 (기타 4:13, 18:41), 그리고 ③ 악한 행위자를 벌하는 정의의 수호(기타 4:8) 등이다.

결국 『기타』는『우파니샤드』의 기본 가르침을 받아들이되 해탈에 장애가 된다고 보는 행위를 재해석함으로써 삶에 대해 부정적인 우파니샤드 가르침과의 모순을 피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사회윤리 체계의 재확립: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힌두 사회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6세기부터 『푸라나』 형성시기인 기원 2세기 사이에 무질서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은 전통적으로 힌두 사회를 유지시켜왔던 브라만교와 브라만 사제 계층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민족의 침입이었는데, 브라만교와는 상반되는 그들의 태도나 관습이 힌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데 있다. 그 결과 슈드라의 지위가 높아지고 브라만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되는 등, 카스트 제도가 오염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파니샤드, 불교, 자이나교 등에서 제시한 세상을 등지는 종교적 가치 추구로 인하여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고행 생활에 몰두하는 고행자들의 수가 급증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기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브라만 사제 계층이 위와 같은 위협에 대처할 다양한 수단을 필요로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즉 현세적인 삶 또는 사회 유지의 측면을 중시하면서 궁극적 추구점인 해탈을 추구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종교사회적 의무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가 중시되게 되는데 이렇게 되어 새로운 사회윤리 규범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Varṇāśramadharma)’이다. 이를 제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서사시 시기에 편찬된 『다르마샤스트라』이고 이 중 『마누 법전』(기원전 2세기~기원 1세기)이 대표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는 사회의 네 계층 가운데 노예계층인 슈드라를 제외한 세 계층, 즉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등이 밟아야 할 이상적인 인간 삶의 네 단계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목샤, 즉 해탈을 실현하기 위한 단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다.

 

1) 브라마차리야(Brahmacharya, 학생기)
이 시기는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는 학생기로 보통 이 시기의 학생은 그의 구루(스승)의 집에 머물면서 『베다』의 핵심되는 가르침, 명상 훈련, 자기 억제 등을 배우고 집안에서 행하는 종교 의례에 참여하고 집안일을 돕는다.

 

2) 그리하스티야(Grihasthya, 가장기)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의 책임을 떠맡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는 시기로 네 단계 중에서 가장 중시된다. 그래서 이 단계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해탈을 추구하는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

 

3) 바나프라스티야(Vanaprasthya, 은둔기)
흔히는 50세 이후에 가정의 모든 일과 소유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세속적 모든 집착에서 떠나는 시기로 부인과 함께 숲으로 가서 그곳에서 명상과 고행 생활을 한다.

 

4) 삼냐사(Saṁnyāsa, 고행기)
세속적인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오직 해탈의 추구에만 몰두하는 시기이다. 이때가 되면 간단한 옷과 구걸 밥그릇 그리고 물단지 등을 제외한 세속적인 모든 부와 욕망을 버리게 되고 모든 다르마에서도 자유롭게 된다. 인간적인 접촉과 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명상을 함으로써 그의 영혼은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삼냐사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실현할 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삶의 네 단계는 오늘날까지도 힌두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스므리티 문헌에서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두 번째 단계가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이것은 결국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이론이 종교적 가치인 목샤와 사회적 가치인 다르마 간의 긴장을 해결하고 이 두 가치를 균형 있게 추구하려는 후기 힌두교의 시도를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V. 힌두교의 종파

 

쉬바 신과 비슈누 신에 대한 숭배는 기원 5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두드러진 종파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자이나교와 불교는 그 지지 기반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반면에, 쉬바 신앙과 비슈누 신앙은 당시 확산을 시도했던 많은 힌두 신앙들 가운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중요한 두 종파였다. 사실 오늘날 이들이 힌두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부분의 힌두교 신자들이 이 두 종파 및 그들과 관련된 여신들을 숭배하는 종파에 속하는 신봉자들이다.

 

그러나 이 두 힌두 종파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흔히 종파(sect)로 나누어지게 되는 원인을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다 두기도 하는데, 힌두교의 경우는 두 종파간에 교리 체계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숭배 대상이 되는 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쉬바나 비슈누를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 구체적인 인격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마는, 각 종파의 신봉자들은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최고의 신으로 간주하고 그 이외의 신들은 그 신에 종속되어 있는 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발전 과정에서 이 두 신들을 동등하게 결합시키려는 운동이 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리하라(Hari-Hara)이고 이에 대한 숭배가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있다.

 

1. 쉬바 신앙

 

쉬바 신앙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적인 형태의 쉬바 신앙은 아리아인들과 인도 토착인들의 종교 요소들이 혼합된 형태로 보인다. 쉬바 신앙의 특성은 쉬바를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찬양하고 신에 대한 고도로 구체적인 개념을 지니며 쉬바 신과 그 신봉자와의 관계가 인격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유신론적 성격을 띠는 『쉬베타쉬베타라 우파니샤드』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자존하는 진리이며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동일시되는 동시에, 모든 신들의 왕이다. 그래서 그는 우주의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를 되풀이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그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파괴와 재생, 둘 모두의 신으로 유명하다.

 

쉬바 신과 재생력과의 관련성은 인도 전역에 걸쳐 있는 거의 모든 쉬바 사원에서 발견되는 쉬바링가(Śiva-Linga)에서 찾을 수 있다. 쉬바의 주요 숭배 대상은 쉬바 상보다는 이 링가 상이다. 이 링가 상은 똑바로 세워진 돌로서 인도 내에 수백만 개가 있다. 흔히 서구학자들은 이 링가 상의 모습이 남근과 유사하고 쉬바 숭배 형태가 고대 인도 토착민들의 풍요신 숭배와 관련된다고 보아서 쉬바 신을 재생과 풍요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쉬바 신앙의 신봉자들은 링가가 남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링가 자체가 파괴와 재생의 신인 쉬바의 구체적인 표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적인 신으로서 쉬바는 비슈누와 같이 아바타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숭배자들에게 스스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는 친근하거나 온화한 느낌을 주는 비슈누와는 달리 대체로 무시무시하고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화에 의하면 그는 그의 부인 파르바티(Parvati)와 수많은 가나(gana)들과 함께 카일라사(Kailasa)에 살고 있고 그의 힘은 사람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고 인류의 해체와 재생을 상징하는 두개골 목걸이를 하고 있다. 또한 가장 사랑받는 쉬바 상 중 하나는 춤을 추고 있는 쉬바를 묘사한 나타라자 상이다. 춤 예술의 최고의 이상으로 믿어지는 쉬바의 춤은 창조, 유지, 파괴 그리고 미망과 해탈 등 순환적인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행위를 극화시킨 것이라고 설명된다.

 

결국 쉬바는 창조력과 파괴력 모두를 표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모순되는 속성은 그의 활동적인 에너지인 샥티(śakti)의 인격화라고 설명되는 그의 배우자들의 속성으로도 나타나서, 칼리(Kali) 여신은 파괴를 상징하고 요니(Yoni) 신은 재생산을 의미한다.

 

2. 샥티 신앙: 여신 신앙

 

쉬바나 비슈누 신 이외에,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고 있는 숭배 형태는 여신들에 대한 숭배이다. 이 여신들은 신의 창조적인 에너지 또는 힘을 의미하는 샥티가 구체적인 인격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어지는데, 흔히는 쉬바나 비슈누의 부인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 여신 숭배는 쉬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로 쉬바 숭배자들 사이에서가 장 널리 행해지고 있다.

 

샥티 숭배의 근원은 모든 것을 생산해내는 자연력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성적인 요소로서의 이 자연의 풍요와 생산성에 대한 믿음은 모든 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는 숭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캬 학파의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현상계의 존재가 남성적 원리인 쉬바(푸루샤)와 여성적 원리인 샥티(프라크리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원리의 결합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 중에서 여성적 원리인 창조 에너지가 보다 강조되는 것이 샥티 신앙이다.

 

쉬바의 배우자들인 파르바티, 암비타, 움마, 두르가 그리고 칼리 등은 대표적인 여신들로 때로는 쉬바 자신보다도 더 중요하게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신봉자들은 몇 가지 은밀한 종교 수행을 통해서 이들 여신의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초인간적인 능력의 획득도 여신 신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주술적인 행위나 말들이 모두 이 샥티 숭배에 속한다.

 

여신들은 그 중요성이 점차 강조됨에 따라서 여신 자신이 최고신의 위치에 이르게 되어 우주를 낳고 또 파괴시킬 수 있는 모신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특히 칼리는 파괴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서 피를 마시고 죽은 시체를 먹는 무시무시한 여신으로 유명하다.

 

또한 샥티 숭배는 성적인 욕망이나 즐거움과도 밀접히 관련되어져, 여신 숭배자들에 의하면 쉬바와 샥티(여신)가 서로 갈망하여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샥티가 갖는 성적인 요소를 중시함으로써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려고 하는 숭배 형태가 바로 밀교(Tantrism)이다. 밀교 역시 우주의 본질과 자아의 합일을 통한 해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통 힌두 견해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성보다는 감각에 기초를 두어 모든 자연적 본능의 충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밀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에 내재하는 샥티를 통하여 절대자인 쉬바와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결합이 밀교 문헌에서 성적인 결합으로 상징화되고, 실제로 성적인 결합이 수행의 중심이 되고 있다. 남녀의 성적인 결합이 쉬바 신과 여신과의 창조적인 결합으로 고양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밀교 관행의 대중적인 인기는 인도의 여러 사원에 조각된 수많은 남녀 신들의 구체적인 교합상에 잘 나타나 있다.

 

3. 비슈누 신앙

 

스므리티 전통의 형성과 더불어 쉬바와 함께 힌두교의 주요 신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비슈누와 그의 두 아바타라(화신)인 라마(Rama)와 (Kṛṣna)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인 여신들을 승배하는 종교를 비슈누 신앙이라 부른다.

 

비슈누 신앙은 여러 점에서 쉬바 신앙과 유사성을 지닌다. 예를 들면 그 기원과 역사가 분명치는 않으나 비아리안 기원을 갖는다고 추정되고, 서사시 시기에 주요 신앙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중세 이후 남부에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는 점, 또 두 신이 각각 최고의 인격신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박티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쉬바 신앙의 음유 시인인 아디야르들과 같은 알바르(Alvar)들이 있어 이들이 대중들 사이에 비슈누 신앙이 파고드는 데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자이나교를 인도에서 사라지게 만
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또한 두 신의 성격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 쉬바가 파괴적이고 두려운 신으로 묘사되는 반면, 비슈누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화해의 신으로 묘사되고 그가 갖는 세계의 유지와 구원의 기능이 강조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바타라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아바타라의 의미는 비슈누 신앙자의 구원에서 보다 확대되어 세계가 악의 세력에 의해 위협받게 될 때마다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비슈누 신이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지상에 내려온다는 믿음으로 발전되었다.

 

인도 종교 내에서 비슈누가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크리슈나와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크리슈나는 바가바타파의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이 스므리티 전통에서 수용된 것이다. 이 크리슈나를 비슈누의 아바타라로 흡수함으로써 비슈누 신앙은 힌두교의 가장 대중적인 종파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이는 비슈누 신앙에서 가장 중시되는 문헌인 『바가바드기타』와 중세 이후 작성된『바가바타 푸라나』에서 크리슈나가 비슈누의 아바타라로서 두드러지게 찬양되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아바타라 이론은 비슈누 신앙이 타 신앙 형태들을 자신의 신앙 내에 무리 없이 수용,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비슈누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크리슈나 이외에 고타마 붓다를 들 수 있다. 비슈누 신앙은 붓다를 비슈누의 아바타라로 설명함으로써 불교를 자신의 신앙 내에 흡수시킬 수 있었다.

 

비슈누는 그의 숭배자들에게 우주의 근원이며 최고의 존재로 여겨져서 그에게 피난처를 구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어진다. 이를 위해 숭배자들이 행하는 다섯 가지 형태의 박티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사원과 상을 닦는 행위, 둘째 의례인 푸자(puja)에서 꽃과 향수를 바치는 행위, 셋째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 제물을 바치는 행위, 넷째 툴씨 씨앗으로 만든 염주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다섯째로 신과 결합하려고 노력하는 행위 등이다.

 

4. 암소 숭배

 

암소를 신성시하여 보호하는 관행은 힌두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하고도 독특한 요소이다. 그래서 간디는 암소 보호가 모든 힌두교도들의 공통되는 믿음이며 힌두교와 다른 종교들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암소 숭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힌두교도들은 암소 자체는 물론 암소로부터 나오는 것들, 즉 우유나 버터 그리고 오줌과 쇠똥까지도 신성시하여 암소의 살해를 절대적인 금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암소 숭배는 힌두교의 신들과 관련된다. 암소 몸의 모든 부분을 신들의 거처라고 믿어 꼬리 끝털 부분에는 야마(Yama) 신이, 콧구멍에는 쌍둥이신인 아슈빈(Aśvins) 등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후기 힌두교의 주요한 세 신들과 관련되어 신성시되는데 힌두 신화에서 쉬바가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 암소 난디(Nandi)는 독자적으로도 숭배를 받고,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도 암소와 관련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암소는 브라마 신과 같은 날에 창조되었고 암소 살해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죽이는 죄와 같다고 믿어졌다.

 

소를 신성시하는 관행은 인더스 문명의 종교에서부터 발견된다. 그러나 암소보다는 정력과 힘의 근원인 황소가 신성시되었고 초기 아리아인들 시기에서도 암소에 대한 숭배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다 베다 시기에 이르러 우유와 버터를 제공해주고 중요한 노동력인 황소를 낳아주는 암소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되게 된 듯하다. 『리그베다』에서 암소는 아그냐(aghnyā, 살해할 수 없는)로 언급되는데 이는 주로 젖소에 대한 살해 금지였고 황소나 암소들은 종교 또는 공공의 이유로 살해되기도 해서 특히 인드라에게는 많은 소 희생제의가 바쳐졌다. 그러나 이후 시기에 동물 보호를 위한 특별한 규정들이 세워지게 되고 암소 살해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암소 숭배가 힌두교에서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때는 기원후 첫 수세기들에서이고 푸라나 시기(6∼7세기)에 보다 더 강화 되었다.

 

아주 최근까지도 암소를 살해한 자는 카슈미르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금세기에는 돼지를 신성시하고 반대로 쇠고기를 먹는 무슬림들에 의한 암소 살해가 과격한 지역 폭동을 초래해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심각한 종교 분쟁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V. 현대의 힌두교

 

힌두교가 이슬람과 접촉하게 된 시기 이후의 힌두교사 전개는 이슬람, 기독교 그리고 서구와의 접촉을 통해 직면하게 되는 외적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1. 이슬람의 영향과 시크교의 형성

 

기원 7세기 무렵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는 무함마드라는 예언자에 의해 유일신인 알라를 믿는 이슬람이 생겨났다. 선교적 성격이 강한 이 새로운 종교는 수십 년이 채 못 되어 전 중동 세계로 퍼져나갔고 8세기 무렵에는 유럽과 인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13세기에 이르면 인도 북부 일대를 석권하게 되고 16세기에는 인도에 무굴제국을 건설하고 마침내 인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인도 침입은 서로 커다란 상이점을 지니는 두 종교를 만나게 했다.
즉 알라(Allah)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주장하여 알라의 표상을 일체 금지하고 또 그에게 소를 희생 제물로 바칠 뿐만 아니라 알라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무슬림들과는 달리, 힌두교도들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는 다양한 신들의 존재를 믿었고, 그 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세워진 사원들은 많은 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는 신성한 동물로 믿어져 살생이 금기로 되어 있었고 사회를 여러 계층으로 구분하는 카스트 제도가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같은 현격한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서로간의 잦은 충돌을 불러일으켰고 또 많은 수의 힌두교도들이 평등을 주장하는 이슬람을 선호하여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나 힌두교는 다양성과 이질성을 수용하여 융화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 믿음 체계를 유지하면서 이슬람의 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이슬람과 힌두교를 화해시키려는 가장 두드러진 시도로 15세기에 나타난 것이 바로 시크교이다.

 

이슬람의 인도 전파는 인도가 독립 당시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과 힌두교도가 국민의 대다수(약 85%)를 차지하는 인도로 분리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무슬림들이 여전히 인도에서 소수 집단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충돌 문제는 여전히 인도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2. 시크교

 

창시자인 나나크(Nanak, 1469-1539년)는 수세기에 걸쳐 힌두교도와 무슬림들 사이에 빈번한 충돌이 발생해왔던 펀잡 주 라호르의 크샤트리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아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중에 신의 모습을 보게 된 이후 이슬람과 힌두교가 근본적으로 통합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두 신앙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시크교의 경전『그란트』에 의하면 그는 이슬람에서는 신 개념을 받아들였다.

시크교의 신은 그의 의지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이면서 또한 내재적인 유일한 주재신으로, 어떤 다른 것으로 화신하지도 않고 이름이 그리 중시되지도 않는다. 만일 주어진다면 단지 사트남(진정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이 신을 어떤 한 종교 집단에 국한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알라나 라마, 쉬바 등의 이름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힌두교로부터는 마야 이론 그리고 업과 윤회 개념을 받아들였다. 즉 신은 유일한 실재이며 그 나머지는 비실재이다. 또한 인간은 신과 떨어져 살게 되면 악업을 쌓게 되고 그로 인해 계속해서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신비가인 나나크에게 중요한 것은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었고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정신적인 지도자인 구루의 지도를 통해 명상하고 신에 대한 사랑과 찬양의 찬가를 부르는 박티 행위였다.

 

시크교의 구루는 나나크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구루인 고빈드 싱(Govind Singh)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구루들이 있다. 그러나 초대 구루인 나나크에 의해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을 결합시키려는 평화적인 시도로서 출발한 시크교가 이후 구루들로 이어지면서 호전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무슬림들의 적대감을 야기한 근원이 되었고 이후 힌두교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서 시크교 역사는 폭력과 유혈로 점철되어 있다.

 

무슬림들이 시크교의 존재를 정치적인 위협과 종교적인 오류로서 해석함에 따라 둘 사이의 적대감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마지막 구루인 고빈드 싱은 무슬림의 반대 세력에 직면하여 시크 공동체의 호전적인 성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의해 모든 시크교도의 성에는 사자를 의미하는 싱(Singh)이란 말이 덧붙여지게 되었고 호전성을 나타내는 칼 등을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시크교도들의 호전성과 용맹성은 무슬림들과의 투쟁에서는 잔인함으로 나타났고, 영국 군대와 독립 후의 인도 군대에서는 명예로운 군인의 명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들 간의 유혈 충돌은 인도의 심각한 종교, 사회, 정치 문제가 되고 있다. 시크교도들은 그들이 모여 사는 펀잡 주의 자치를 요구하며 유혈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예로는 시크교의 중심 사원인 황금사원에 대한 인도 정부의 공격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인디라 간디 수상이 암살된 사건을 들 수 있다.

 

3. 라마크리슈나 운동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인도는 서구와 만나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한 기독교와의 만남과 서구 교육을 통한 과학지식과의 만남은 전통적인 가치들이 도전받고 새로운 가치 체계가 도입되는 상황을 낳았다. 19세기 초의 인도인들은 이러한 서구 사상의 도전에 직면하여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인도의 종교 내지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들이 그것이다. 이 운동들은 모두 벵골 지방에서 시작되어 나머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그 반응 양태는 급진적인 개혁과 보수적인 방어 그리고 이 양극단 사이에 여러 형태의 반응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인도에서 일어났던 모든 힌두 혁신운동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고 널리 퍼진 것이 바로 라마크리슈나 운동(Ramakrishna Movement)이었다. 이 운동이 조직되고 체계화되어 인도뿐 아니라 서구로까지 널리 전파되게 된 것은 스와미 비베카난다(Swarmi Vievekananda, 1863∼1902년)에 의한 것이었지마는 이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 사상은 직관적 신비 체험자였던 라마크리슈나(1836∼1886년)로부터 나왔다.

 

라마크리슈나의 본명은 가다하르 차토파다야야로 벵골 지방의 가난한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나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해 기본적인 것 외에는 읽고 쓰지 못했으나 음악과 시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지니고 있었고 직관력이 뛰어난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세에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다크쉬네쉬바르에 있는 칼리 여신의 사원에서 그의 형과 함께 사제 생활을 하다가 다음해 그의 형이 죽은 후, 그 사원의 주 사제가 되었다.

 

그는 사제 생활 기간 중에 사원에 있는 칼리 상이 단순한 상일 뿐만 아니라 칼리 여신의 실제적인 화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칼리 상 앞에서 칼리 신이 그녀의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성한 여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신비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그는 상이 단순한 상 이상이라는 자신의 직관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신비 경험 후, 그는 칼리 숭배 이외의 힌두교 종파들 즉 밀교, 비슈누 신앙, 아드바이타 베단타 등과 그 이후로는 이슬람과 기독교 신앙에도 직접 참여하여 가능한한 다양한 종교 체험을 해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는 동일한 신비 체험을 경험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며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동일한 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다양한 종교들은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대양에서 합쳐지는 많은 물줄기라는 비유로써 설명했다.

 

이후 그의 명성이 벵골 전역에 퍼져나가게 되자,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원에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 나란드란나트다타라는 뛰어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라마크리슈나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비베카난다였다. 그는 라마크리슈나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그 운동을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사회적 차원을 덧붙임으로써 사회봉사 운동의 성격을 띠게 했다.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비베카난다는 자신이 회의주의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라마크리슈나를 만나 큰 감명을 받고는 그의 밑에 들어가 그의 제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보게 되고 그가 죽은 이후에는 라마크리슈나 수도승 조직을 만들어 “인간에 대한 봉사가 신을 숭배하는 것” 이라는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을 재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힌두교 대표로 연설하게 되는데, 모든 종교의 통합성을 주장한 스승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여러 종교들의 동등한 가치를 주장하며 종교간의 갈등과 충돌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연설은 많은 주목을 끌었고 서구 사회에 힌두교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897년 그는 인도로 돌아와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조직하고 종교적인 활동과 더불어 병원, 고아원, 초등학교, 대학교, 대중문화 센터 등 광범위한 자선과 교육 활동을 행함으로써 라마크리슈나 미션은 인도인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라마크리슈나 미션은 인도 여러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고 또 출판사를 소유하고 인도 종교와 문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회봉사 단체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5. 최근의 힌두교 구루들

 

힌두교가 현대 시기 이전에 이미 스리랑카나 인도네시아 등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파된 예가 있긴 하나 힌두교가 서구에 전파되게 된 것은 19세기말 비베카난다를 시작으로 20세기 이후 많은 힌두 구루(정신적 스승)들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이들 최근의 힌두교 대변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로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의 창시자인 마하리슈 마헤시 요기(Maharish Maheshl Yogi, 1911∼ ), 국제 크리슈나 의식협회(TheInternational Society of Krishna Consciousness)의 창시자인 스와미 A. C. 박티베단타(Swami A. C. Bhaktivedanta, 1896∼1977년) 그리고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Sri Ramana Maharishi, 1879-1950년) 등이 있다.

이 중 마헤시 요기와 라마나 마하리시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관련된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다. 특히 마헤시 요기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신성한 내적 본질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게 될 때 발휘할 수 있는 인간 자신의 해방 능력을 강조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힌두 명상법인 초월적 명상(T.M.)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많은 명상센터 건립에 성공했고 요가를 정서적 안정과 신체 건강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