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이탈리아

아드리아해 곳곳에 남아있는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흔적들

arakims 2018. 1. 29. 20:48


흔히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들으면

물의 도시와 곤돌라를 떠올립니다.



이탈리아는 20년전 유럽선진연수 시찰단으로 다녀왔는데

베니스는 너무 북쪽에 있어서 일정상 가보지 못했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 1호로 추가합니다.


오랜 옛날

훈족의 이탈리아 무차별 침공시

기병이 닿지 못하는 갈대 우거진 땅으로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망쳐온 사람들이

아름다운 물의 도시로 가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땀흘려 일구었던 나라

중세 유럽을 풍미했던

부유한 천년 강대국 베니스랍니다.



초기정착민이 소금 채취, 판매로

나라생활의 기반을 닦았고

배를 만들어 상업에 성공을 거두고

베니스의 상인이란 역사적 소설을 남기면서

우수한 갤리선을 타고 다니며

아드리아해의 재해권을 장악하면서

쌓여가는 부의 축적을 주체할 수 없는

무역중심 공화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립니다.



오스만터키의 침공에도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유럽국가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무역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이동하는

세계적인 큰 흐름을 읽지 못한 이유는 큰 실책이었습니다.

소위 잘나갈때

내일을 내다보지 못한 우를 범한 것입니다.


배부르고 편할때라도

누군가는 미래의 먹거리를 늘 걱정하는 팀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대서양 시대가 열리고 있는데도

새 무역항로 개척에 둔감하고 있다가

동방 육로 무역이 막혀 파이가 작아지고

설상가상으로

아드리아해의 제해권마져도 잃어가면서

아드리아해 깊은 곳에 고립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편안함, 향락과 사치에 이미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의 가면 무도회, 카니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요 

세계 최초로 식탁에 포크와 손씻는 물 그릇 활용

수준 높은 소비 생활 만큼은

유럽 상류 사회의 표준으로 자리잡을 정도였습니다.


현실타파와 생존전략으로

직물 제조, 유리세공, 관광 활성화 등으로 돌파구를 찾으며

겨우 현상유지에 성공하나 싶었는데



강력한 정복자 나폴레옹 침공군이 코앞에 다가옵니다.

한때 프랑스보다 더 강력했던

천년 공화국도

국력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기에

압도적인 원로 투표 결과에 의해서 항복 절차에 서명합니다.


다행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결사항전을 했더라면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오늘의 베니스와는 상상할 수 없는

폐허만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후세를 위해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도시 보존을 위한 노력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동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아름답고 유서깊은

많은 도시국가들의 성곽을 관광하게 되었는데

도시마다 베네치아의 영향을 받았다고들 합니다.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부드바, 코토르......


이런 중세의 해안 도시국가들에는

한결같이 베네치아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역사 자료를 읽어보니 베네치아는

문화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한 천년 공화국이었었네요.



베네치아의 두가지 죄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것은 죄

기업이 이윤을 남기지 못해 세금 납부를 못하는 것은 죄

그러니 베네치아가 발전할 수 있었겠지요.


베니치아의 한계

훈족에 쫒겨 갈대밭 갯펄에 나라를 일구었기에

순수 혈통주의를 유지합니다.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식민지도 생기고 용병들도 많이 고용하게 됩니다.

순수 혈통주의 바깥에 있는 타 민족들은 어쩔 수 없이

돈때문에, 이익때문에 베네치아에 붙어 있습니다.

또한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내 돈만을 보고 내 주위에 몰려왔던 사람들은

내가 돈 없으면 속절없이 떠나버리듯이

그들에게 내부적으로

베네치아에 충성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쌓여가는 부로 국민들은 향락에 물들어

자녀들을 전투에 내 보내기는 싫어하게 되어버린 풍토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주겠지 하는 바램은 바램일 뿐입니다.



나폴레옹이 코앞에 들이 닥치니

칼을 들고 맞서는 전투 의지가 아예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울어가는 나라엔 용병들도 기피합니다.

천년 공화국이 그래도 재력은 남아 있으나

순식간에 힘 한번도 쓰지 못하고 폭망하게 되는 이유가

결국은 순수 혈통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3D업종 기피현상과 농촌현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났는데

순수 혈통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국론 분열을 초래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베네치아라는 땅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드리아해를 장악하고

멀리 흑해, 아프리카 등에 식민도시국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니

중세 유럽 역사 공부가 흥미진진해지기만 합니다.



<나무위키 자료입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경 고대 로마가 쇠락하고 있을 당시 이민족들[4]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사람들이 이탈리아 동북부 아퀼레이아의 석호에서 모이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고 7세기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로마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도제[5]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810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샤를마뉴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중세를 기점으로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국가로 등극하면서 엄청난 부를 과시했다. 특히 십자군 전쟁 중 처음에는 제노바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였으나, 엔리코 단돌로가 도제였던 1202~04년의 4차 십자군 전쟁 때 원래 이슬람을 치기 위해 모여든 프랑스 기사단을 빚[6]을 이용해서 헝가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공격[7],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중요 상업루트를 독점해 단번에 제노바를 따돌리고 동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했다. 헝가리를 공격한 것 때문에 교황청에게 파문을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8] 이후에는 심지어 프랑스인을 동로마의 옥좌에 앉히고, 교황청의 승인까지 받아서 '라틴 제국'을 창설해 1261년까지 60년이나 그리스를 간접 통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리스 정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 그리스인과 프랑스인의 관계는 험악해지다 못해 최악으로 변했다.[9]

13~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수행했다. 라틴 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제노바가 차지하여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였기에 때로는 결정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했지만 반격을 가해 실지회복에 성공한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가 얻은 교훈은, 섬을 둘러싼 육상 영토의 중요성이었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에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4차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중상모략을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된다.[10]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교황청이 발목을 잡은데다[11]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를 모두 모아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했다.

다만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면 아직까지는 취약한 상태였던 오스만 함대의 포위는 풀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12]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분명한 것은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이 허약한 베네치아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 없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끼어들었다고 해서 로마의 멸망을 막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끼어들었다면 훨씬 빠르게 동지중해의 세력권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13]만으로 오스만 제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시한부 신세였다. 서유럽 전체가 연합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면 모를까,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제4차 십자군 이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까지의 13~15세기에는 지중해 곳곳과 발칸반도에 무역거점을 잔뜩 건설해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으며 당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르네상스의 발전에도 큰 공로가 있는데,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로마의 선진 문화를 일선에서 받아들이는 지역이 되었다. 포크냅킨, 손가락 씻는 접시를 서유럽에 소개한 것도 베네치아인들로, 11세기 후반 베네치아 도제와 결혼한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했다. 여기서 대단한 것은, 쥐꼬리만한 본토를 가진 베네치아가 발칸 반도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는 것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약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14]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1512~1520)에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고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만 베네치아는 말이 도시 국가, 당시 기준으로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도시 국가 기준으로 보면 매우 컸고, 도시화율이 높아 200만명, 영국의 절반 정도로 인구 역시 무척이나 많았다.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1499년부터 1503년까지 전쟁을 하였으나 패한 후,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 지배권을 상실한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 유지된다. 식민지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했으나 체자레 보르지아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저지당했다. 특히 율리오 2세가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를 다 토해내게 된다. 그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동맹. 1515년에 이르러 야나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씻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북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다.

1520년대에는 스페인포르투갈 등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루트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1521년에는 포르투갈을 통해 베네치아가 독점하던 향료가 더 싼 가격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거부당하기도 하였다.[15] 그러나 여전히 바다에서는 매우 강했고, 사실상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러나 키프로스를 상실하여 팔 한 쪽이 뽑혀나가는 동시[16]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 가량인 5만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17]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당연히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영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어야 하는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점점 고립주의적으로 변하게 된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 당하고 말았다. 망했어요.[18] 이후 베네치아가 예전의 부와 힘을 되찾는 일은 없었다.

베네치아는 한동안 경제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 제일의 부국답게 쇼미더머니 급의 재력을 자랑하며 무한대에 가까운 보급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이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된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19]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을 이용해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이후에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다.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서 싸웠다. 그 결과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로부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등을 획득하여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을 세웠다.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에 할양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