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U.S.A/워싱턴 주

[스크랩] 미국 독립혁명

arakims 2011. 9. 14. 13:54

미국 독립(American Revolution)은 18세기 중엽에 13개 식민지가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수립한 것을 말한다. 미국 독립혁명,미국 혁명이라고도 한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양대 민주주의 혁명으로 유명하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 13개 식민지는 대영 제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을 벌였다. 미국 독립선언1776년 발표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확고히 한 것은 1781년이었다.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난 1763년, 대영 제국이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수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한 것이 미국 독립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영국 제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이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대륙회의를 결성하였다.

1775년 보스턴 차 사건이후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미국내의 왕당파가 인구의 30%에 이르렀음에도 독립파들은 전쟁기간동안 식민지의 80%이상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영국 제국은 일부 해안 지역만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76년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을 수립하였다.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후 에스파냐네덜란드 공화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미국의 대륙군1777년 사라토가 전투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 제국의 군대에 승리하였다.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미국 독립 초기의 공화주의자들, 특히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던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로 민주주의의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은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 독립은 미국적 가치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편집] 배경

[편집]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회 계약설을 비롯한 존 로크자유주의 사상은 미국 독립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회 계약설은 사회 구성원의 권리에 반하는 지도자에 대해 지도자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를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사상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 독립에 영향을 주었다. 각 주와 국가의 헌법 작성에서는 몽테스키외권력 분립 사상이 반영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 1775년 13개 식민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공화주의의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영국 정치의 부패에 비판적이었던 영국의 "지방당"[1]은 미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엇다. 식민지의 대표자들은 영국의 신분제의회에 속해 있었으나, 이러한 귀족정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부패는 더할 나위 없는 악이었고, 남자라면 자신의 욕망에 앞서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공익의 실현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즉, 남자는 시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한편, 에비게일 아담스메르시 오티 와렌같은 사람들은 여성들에 공화국의 모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자신의 아이들에게 공화국의 가치와 근검 절약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무엘 아담스, 페트릭 헨리, 토머스 페인,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아담스와 같은 미국의 "국부"들은 공화주의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편집] 항해법

당시의 대영 제국은 제국에 이익이 되거나 다른 제국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정책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중상주의적 정책의 일환으로 항해법을 제정하여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경제를 규제하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이러한 정책은 한동안 유명무실하였으나 점차 강력히 추진되어 식민지와 영국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1761년 매사추세츠 주의 변호사 제임스 오티스는 이러한 대영 제국의 정책이 명예혁명을 통해 작성된 1689년 권리장전에 보장된 식민지 주민들의 권리를 명백히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재판에 패배하였으나 존 아담스는 "여기에서 미국 독립이 비롯되었다"고 평했다. 1762년 페트릭 헨리버지니아 주2페니 법조지 3세가 거부하자, "왕이 자신의 국민에게 이로운 역할을 하지 않는 다면, 그는 다만 폭군일 뿐이며 왕으로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편집] 서부 확장

1763년 조지 3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경계로 그 보다 서쪽에 있는 땅을 개척하거나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이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식민지 이주민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려는 시도였으나, 서부로 확장을 강력히 원하던 식민지인들은 영국 왕의 이러한 정책에 강력한 반감을 보였다. 이러한 반감은 독립 전쟁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편집] 대표자의 참여 없는 세금 부과

영국은 7년 전쟁의 승리로 케나다, 플로리다, 미시시피강 동안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 등을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할 수 있었으나,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은 이러한 재정 지출을 식민지에 전가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영국은 설탕법, 1765년 우표법, 톤젠드 조례등을 통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세금의 부과는 식민지 대표자들의 참여없이 영국 의회 단독으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 대표자들은 "대표자의 참여 없는 세금은 무효"라며 맞섰다. 1773년 차 세금 법은 결국 보스턴 차 사건을 불러일으겼으며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편집] 독립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 독립 전쟁입니다.
1754년 벤저민 프랭클린의 삽화, 흩어지면 죽는다

영국 제국13개 식민지의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아 1775년 양 군대의 첫 전투렉싱턴-콩코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주요 전투로는 벙커힐 전투, 보스턴 공방전, 사라토가 전투, 요크타운 전투 등이 있다. 전쟁 기간 중인 1776년미국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으며 대륙군의 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초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미국의 승리로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대영 제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 독립선언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 독립선언입니다.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의 폐회 연설에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를 계기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2]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 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3] 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로 부터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다 ……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 미국 독립선언문, 1776년 7월 4일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대표자들은 미국 독립선언에 서명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여긴다.[4] 그러나 실질적인 독립의 인정은 전쟁이 종료된 1781년에야 인정되었다.

미국 독립선언에는 자연법에 근거한 인권의 주장, 사회 계약설에 의한 정부의 구성 등 당시 미국 독립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의 사상이 대변되어 있다.

[편집] 헌법의 제정

미국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문헌법을 제정하였다.[5]

헌법회의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하여 지도되어 연방주의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와 토머스 제퍼슨 중심의 주권파가 대립하였으나, 연방주의자들의 견해 점차 회의를 지배하게 되었다. [6]

미국의 첫번째 헌법은 1781년에 제정된 연합규약이었다. 이는 중앙정부가 없이 13개 주정부가 연합한 형태였다. 중앙집권제를 전제왕권과 동일시하여 이것이 독재와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이라고 여겨서,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7]

13개의 국가는 각자 완전한 주권을 가지며, 연합규약에 의해 연합회의가 설립되어 외교, 국방, 화폐, 인디언대책 등의 공통사항을 처리했다. 중요사항은 13개국 중 9개국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회의는 권고까지만 할 수 있었다. 또한 징세, 통상규제 권한이 없고 상비군도 없어서 오늘날의 UN과 비슷하였다. [8]

출처 : 부끄럽지않게살자!!
글쓴이 : 부끄럽지않게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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