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ㅺ 방랑 삼천리/정읍 고창 전북

전북 고창 모양성2

arakims 2008. 6. 21. 21:37

 

 

 

         

고창인물들 말하자면 호남의 인물들의 하는 일이다. 유교적인 모든 절차를 수행하는 것에서 부터, 나랏일에 대한 것에 이르기 까지 난상토론이 이어진 곳이다.

  조선조하면 당파싸움이나 했던 시절로 치부해 버리기 쉬운데 이건 일본이 조선의 멸망을 당연하게 느끼도록 역사를 왜곡하고망한 나라의 역사로 고착시킨 것 같다.

 

          

사진 작품을 만들어보기 위해 정성을 들여보았다. 오른쪽은 햇빛을 이용하여 건물에 조명 효과가 드러나게 촬영하였다.

  왼쪽 사진은 감옥을 둘러싼 담장의 윤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도주할지도 모르는 범인들의 담장 넘기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 것 같은데 뒷모습은 너무 멋진 것이었다.

 

         

이 곳에서는 관아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는 곳이다. 물론 손님을 맞이할 경우 준비해야 하는 모든 생활 필수품을 마련하고 경비를 정산하기도 하였다.   물자 조달을 위해 머슴은 지게를 지도 정해진 장소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범인 대기 장소처럼 줄을 친 곳에 서있도록 해야만 했을까?

 

         

자연과 잘 어울린 읍성은 한여름의 매미 소리와 함께 나무 그늘에서 피서를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제법 오랜 세월을 간직한 홍송의 숲에서 흐르는 약수는 이 곳을 방문한 나그네들의 마른 목을 촉촉히 적셔주었다. 이런 인심과 물맛에서 그 유명한 고창 수박이 익어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마을 고창!!!!

 

          

 

         

 

          

 

         

 

소재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조선 초기의 석축 읍성. 둘레 1,684m. 사적 제145호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고창 지역이 백제 때 毛良夫里로 불리었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동쪽으로 진산인 반등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세문과 치 여섯군데, 수구문 두 군데, 옹성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읍성이 언제 축조되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고, 『고창읍지』나 『동국여지승람』에 단순히 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내에 三池四泉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숙종 때 이항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고, 1453년에 축조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의 濟州始·和順始·羅州始·癸酉所築宋芝政이라는 각명으로 미루어볼 때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의 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으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홍예문과 초루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이 있어 이것은 서울의 돈화문·홍화문 또는 평양의 고구려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는 것으로, 성곽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76년의 발굴 결과 서문지와 동문지가 확인도었으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시켜 놓았다. 성벽을 쌓은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굄돌을 넣는 방식으로 쌓았으나, 그 가운데는 초석·당간지주 같은 것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그러나 미석 이하의 성각퀴는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여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와같은 읍성의 존재는 중국·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적·군사적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시설이었다. 특히 이 성은 여자들의 성벽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이는 한해의 재앙·질병을 가시게 하는 기양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이다.  

조사자 : 이 종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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