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조선 초기의 석축 읍성. 둘레 1,684m.사적 제145호 공북루(拱北樓)로 북문(北門)이다.
이 성은 왜침을 막기 위하여 조선조 단종원년(1453)에 전라도민들이 힘을 모아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축조한 자연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 하는 이성은 나주 진관 입암산성과 연계하여 호남의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읍성이다.
이 성은 길이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로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饔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느나 병화 등으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이 답성(踏城)을 하는 풍습이 지켜져 오고 있다.
이 현판을 바라보면서 성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여러분을 맞이하는 것이 있다.
이름하여 獄이다. 한 글자 덧 붙이면 감옥. 왜 이런 중요한 자리에 감옥을 설치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규모로 보아 아마 지금의 파출소 유치장 구실을 했었던 같아 보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감옥이 있어야 질서가 유지되는 모양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7월 26일 정말 무더운 한 여름 낮이었다. 문을 통과하려는데 정담을 나누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곽에 올라보니 피서를 보내는 고창 양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남도 사람들 같았으면 시조나 한수 읊조릴 만한 분위기였는데 점잖은편...낮설은 방문객을 숙연하게 하였다
이 곳은 남성 금지구역...그렇게 써 있지는 않았지만...성문을 들어서서 몇십보 안쪽으로 걸어오면 보일 듯 말 듯 그러나 꽤 많게 느껴지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피서 보내는 분위기에 방해될까 두려워 사진도 멀리서 찍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성안 중앙부에 있는 풍화루(豊和樓)는 옆에 못까지 갖추고 있어 풍요로운 주악(酒樂)이 넘쳐보인다.
모양성은 여자들이 무장읍성은 남자들이 쌓기로 하고 누가 먼저 쌓는지 시합하였으나 여자들을 얕본 남자들이 져서 인근의 무장읍성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전설도 있다.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해보이는 축조술이지만 웬지 섬세해서 여성적인 느낌이 들었다. 웬만하면 자연을 건드리지 않고 산 능선을 따라가며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성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규모로 보아 전투보다는 호남의 내륙을 다스리는 고을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수행했던 느낌이 든다.
위풍당당한 고창 원님의 모습이다.
옛날에 고을 원님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과 극이다. 양반이나 벼슬아치는 원님을 만나 정담을 나누었을 것이고, 죄지은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원님의 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불렀을 것이다.
또 성내 사람들과 성밖 사람들의 차이도 엄청 컸다. 성안에서 사는 가진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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