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황조별묘'의 뜻을 알아보자
황조별묘는 해남군 향토문화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재지는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 317번지에 있다.
정유재란(1597)때 명나라에서 조선 구원군 수군도독으로 왔던 진린 장군과 후손들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진린은 군선 500여척을 이끌고 와서 고금도(강진군), 녹도, 금당도(완도) 등에서 충무공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방어하였으며,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곳이 진린과 관련된 것은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1644~)가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진린의 유지에 따라 중국의 광주로부터 관왕묘가 있는 고금도(강진군)에 이주하여 거소를 정한데서 비롯된다.
그 뒤 진영소의 아들 석권과 윤권은 해남으로 이거하여 살며 명의 유민이란 뜻으로 황조동(皇朝洞)이라 하였다. 1679년(숙종5년) 진린을 모시는 단을 만들어 제향하다가 1871년(고종8) 별묘를 건립하였다.
그 후 1960년에 솟을 3문을 신축하였고 1976년과 1983년에 증.개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자료 1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은 광동 지방 출신으로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와 강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에 봉해진 명나라의 장수이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와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그 후 그의 고향으로 돌아 갔다가 뒤에 태자소보(太子小保)에 추증되었고, 그의 손자 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으로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후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참고자료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공격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왜란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전쟁이므로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 및 권율 등의 명장들과 각 지방의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 자발적 저항에 부딪혀 7년만에 일본이 패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대대적 침략 공세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위기이자 극복이였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였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출처 위키백과>
참고자료 3
위패 :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신주(神主)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목주(木主)·위판(位版).
참고자료 4
향사 :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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