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로아티아/두브로브니크

중세시대 체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야경

arakims 2018. 2. 6. 15:26

여기는 드브로부니크 성곽 투어가 시작되는

필레게이트입니다.

소문대로 중세의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어서

하루종일 관광객들이 북적입니다.

당연히

한국 패키지 관광객들이 몰려다닙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진 탓으로

성곽이 아주 견고하고 높은 편입니다.


오노프리오스 샘터에

시민들이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드브로브니크 성내 사람들의 식수를 제공하기위해

오노프리오스가 설계하고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12Km나 떨어진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

시민들에게 수돗물 제공의 발상이 대단하며

더구나 역사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축물 중에서 가히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겠다.


플라차 대로입니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메인 거리입니다.

노란빛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잔물결을 이루며

중세의 아늑하고 편안한 도시의 분위기 속으로

모두들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아늑한 분위기에 취해서

사람들은 말을 잃어버린듯

황홀함에 빠져

넔을 잃고 낭만에 빠진듯 합니다.


1,300여년전

그리스 에피다우루스 피난민들이

이주하여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오랫동안 Ragusa 공화국으로

초기에는 베네치아령으로 있다가

14세기경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1808년 나폴레옹에게 멸망한 후

현재는 크로아티아 소속이 되었다.


드브로브니크는 한때

많은 나라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세계 최초의 약국개설

빈민 구호소 설치운영, 노예무역 중단,

고아원 운영, 식수공급 시스템 완비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운영한

도시국가로 이름이 나 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 아드리아 해안의 진주 - 라 칭찬하였으며

BBC선정 죽기전에 가보아야할

여행지 선정 1위에 올랐으며

꽃보다 누나 프로그램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어

한국 관광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곳이 되었다.


플라차 대로처럼

가장 세련되고 화려하고

은은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은

이웃나라의 침공으로

도시가 대부분 파괴되었을때

유네스코의 힘으로 복구 되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은

세련된 중세도시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위치의

코토르, 부드바, 스플릿트에 비해 반짝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하기를

진정한 천국을 보려면 두브로브니크를 가라!

중세 성곽 마을의 아름다움과

찬란히 빛나는 아드리아해의 어울림

그래서

두브로브니크는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하나 봅니다.


성 블라이세 성당입니다.

오랜 옛날 베네치아는 드브로브니크를 침공하기 위하여

로쿠룸 섬에 군대를 숨겨 놓고 기회를 엿보는 동안

성 블라이세가 정부에 알려주어

침공 계획에 대비하게되어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일을 기념하여

수호성인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성당은 지진, 화재 피해의 경험이 있는데

성당 맨위의 조각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여

또 한번 유명합니다.


옛 라구사 공화국이 지금은 드브로브니크로 불리운다.

7세기 에피다우룸(현 크로아티아 차브 타트)의 로마인들이

훈족, 게르만족이 무서워 이곳으로 이주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세기 이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베네치아와 함께

5대 무역도시로 유명한데

동쪽 이슬람이 전해주는

인도, 동남아시아 향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동양의 싼물건을

비싸게 넘겨 이익을 창출하였다.


무역 경제는 훗날 물거품이 되며

관광산업에 의존하게 된다. 


드브로브니크가 융성할때는

400여척의 선단을 보유하였을 정도라 한다.

해양 강국입니다.

조선시대는 해양 0%의 나라였으니

그저 별 이익 창출이 안되는

농사에 의존하였으니

드브로브니크 같은 영화를 누리지도 못하였을 뿐아니라

남겨준 유산도 없습니다.


드브로브니크의 밤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고

저마다의 추억을 남기려고 돌아다닙니다.


드브로브니크 대성당입니다.

성모 승천 대성당 이라고도 합니다.

세번에 걸쳐 지어진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가 통과하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 피해를 입는 곳입니다.

이 대성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피해 복구를 하였답니다.


당시에 이들은 얼마나 잘 살고 있었을까?

비슷한 도시 베네치아를 가지고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15세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1년간 생활비가 15~20 두캇,  1두캇은 순금 3.56g이라고 합니다.

금값은 1g당 46,993.51원, 환율 1$당 1,087원 (2018.2.6.시세)

지금 시세로 환산하니 25,094,534~33,459,379

믿어지시나요? 평균 3천만원의 생활비

달러로 환산하니 $27,598.9

헉  세계은행 발표 201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같습니다.

베네치아가 잘 살던 시절엔

유럽에서 1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세에 작은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이렇게 누리고 잘 살았답니다.

여기에는 집세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1인당 평균 3,000만원으로 환산하여

베에치아 인구 140만명으로 환산하면 그 액수가

1600만명이 사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비슷하였다고 합니다.

국민소득이 10배이상 차이가 나는데

놀랍지 않습니까?


국가 경제 규모는

세입 115만 두캇 금으로 환산하면  4,094,000g

원화로 환산하면 192,3억91,42만9,940원


대리석 바닥을 장식하고

4층이상의 건물을 축조하여 생활하고

각종 예술적 문화재들을 건설하며

400여척의 선단을 보유하여

아드리아해, 에게해를 누비고 다녔던

드브로브니크 사람들입니다.

하여튼 3차 산업이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인건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도시와 농촌의 현실 격차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도

장사의 대상이 되는가 봅니다.

둘은 그렇다 치더라도

김정은도 크로아티아의 관광도시

두브로브니크까지 유명한가 봅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중세시대에도 검역소를 운영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시대 아드리아해안의 도시국가들은

무역에 의존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나라 사람들을 만난게됩니다.

문제는 교역의 과정에서 바이러스도 함께 따라옵니다.

중세 유럽을 치명적으로 파괴 해버린 질병 페스트

베네치아 상인들이 몽골 병사들로부터 얻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도시 인구의 2/3가 죽어 나가니 공포스러웠겠지요.

따라서

드브로브니크에서도

해외에 다녀온 배들을 대상으로

저런 해안에 40일 체류후

이상이 없으면 상륙을 허가해서

전염병의 피해를 막아 내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요트, 잠수함으로

관광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