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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배경으로써의 힌두교 이해
차 옥 숭
한일장신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종교학
불교를 이야기하기 전에 언제나 말해야 하는 종교가 있다. 불교의 배경이 되는 힌두교이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가 발생한 발생지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교 또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에서 발생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핵심 사상은 윤회, 업, 해탈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동물, 식물, 심지어는 무생물로, 천상, 지상, 또는 지하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오늘의 나는 전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 가의 결과이다.
전생의 “나”가 오늘의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karma, 業).
지금보다 더 낫게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이 몇 만 겁을 되 태어나야 한다는 윤회사상은 사람들에게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사상이 윤회의 끝을 말하는 해탈이다.
불교에서 열반, 또는 니르바나(nirvāṇa)로 부르는 경지는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영원한 경지라고 설명된다. 힌두교의 모든 사상과 수행의 목표는 바로 이 해탈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곳은 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바로 삶으로 이어지는,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곳이었다. 인도인들에게 자연의 모든 것들은 신성한 것이고, 성의 영역인 동시에 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도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강가 강(갠지스 강)에서 보았던 정경들이다. 어둠을 가르고 곱게 떠오르던 붉은 태양도 아름다웠지만, 아침 일찍 어둠이 걷히기 전 배를 타고서 보았던 시신을 태우던 화장터의 광경들이 더욱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화장은 마지막 희생제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생의 삶이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긴 하지만, 화장은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마지막 희생제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또한 시신이 불에 태워지면서 불의 신인 아그니 신이 망자를 정화시켜주는데, 정화된 영혼은 좋은 곳으로 가거나 보다 나은 삶으로 되 태어난다는 것이다.
특별히 인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강가(Gaṅgā) 강은 모든 오염된 것들을 정화시키는 신성한 강으로 여겨진다. 쉬바(Śiva) 신의 머리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강을 이룬다는 강가 강은 어머니 강, 신성한 강, 죽음의 강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죽으면 바로 해탈을 한다고 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밀집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 죽어도 이곳에서 화장을 하면 바로 다음 생에 인간으로 되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죽어도 시신을 옮겨 와 이곳에서 화장을 하여 강가 강에 재를 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밖에 강가 강의 아침은 다양한 사람들로 분주하다. 목욕을 하고 명상에 든 수행자들의 모습, 목욕을 하는 남자들, 샤리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몸을 씻고 푸자(pūjā)를 하는 여인들, 빨래를 하는 사람들, 칫솔이 없어 나무로 이를 닦는 사람들, 경전을 낭송하는 사람, 제기를 정성껏 닦는 사람들, 사람들이 강가 신에게 바친다고 수 없이 띄어 놓은, 꽃이 담긴 조그만 나뭇잎으로 만든 그릇 속의 촛불들이 강물 위에서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아름답게 흔들리던 정경들이 떠오른다.
신발을 닦고 빨래를 하는 일상 바로 가까운 곳에서, 이를 닦고 목욕을 하고 신께 기도를 하는 그곳, 그곳은 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바로 삶으로 이어지는,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곳이었다. 인도인들에게 자연의 모든 것들은 신성한 것이고, 성의 영역인 동시에 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힌두교는 강가 강변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간단하게 규정하기 대단히 어려운 종교이다. 힌두교는 단일한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성격의 종교가 뒤섞인 것이다.
힌두교 안에는 유일신론자(唯一神論者), 범신론자(汎神論者), 다신론자(多神論者),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무신론자(無神論者)가 공존하는가 하면 일원론적 세계관, 이원론적 세계관, 다원론적 세계관이 공존하
고 있다. 또한 다양한 서로 다른 사상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성으로 그 안에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길도 여러 가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과 실천을 강조하는 공덕으로써 이르는 길(karma mārga),
둘째, 지성을 강조하고 자기 수련을 중시하는 지혜의 길(jñāna mārga),
셋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정 신격을 지성껏 봉헌하는 봉헌으로써 이르는 길(bhakti mārga)이 있다.
특별히 봉헌으로써 이르는 길은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된다.
자신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움직임을 오랫동안 세밀하게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대중들에게는 “지혜를 통해서 이르는 길”이나 “공덕(善業)을 쌓아 이르는 길”은 어려운 길이었다.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봉헌으로써 이르는 길”이 일반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구원에 이르는 길까지도 다양하게 제시하는 힌두교는 간단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거기에 정확하게 설명을 하자면,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이주해 온 시기를 기원전 1800년에서 1500년경으로 보고,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화려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그 시기부터 언급을 해야 한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에서 발굴된 그 당시의 유물들을 통해서 이미 그 시기에 윤회나 업에 대한 맹아적인 관념들이 있었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과 실천을 강조하는 공덕으로써 이르는 길,
둘째, 지성을 강조하고 자기 수련을 중시하는 지혜의 길,
셋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정 신격을 지성껏 봉헌하는 봉헌으로써 이르는 길이 있다."
처음 책을 통해서 내가 힌두교를 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창조의 기원에 대한 아리아인들의 초기 관념을 보여주는 베다의 제10권 129번째 송가였다.
물론 ?리그 베다?(Ṛg Veda)에는 우주 창조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담고 있다. 최초의 인간인 푸루샤(Puruṣa)가 자신을 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쳐서 파괴된 푸루샤의 몸으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흥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머리로부터는 하늘이, 눈으로부터는 태양이, 발바닥에서 대지가, 등등.
129번째 송가는 우주의 어떤 부분도 존재하기 이전에 만물의 기원이 된 어떤 존재를 언급하고 그 존재를 유일물(唯一物)이라고만 지칭하고 있다. 나에게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송가를 아래에 소개한다.
그때에는 존재(사트 Sat)도 비존재(아사트 Asat)도 없었다:
대기도 없었고 그 뒤의 창공도 없었다.
움직임이 있었을까? 어디에? 무엇 밑에서?
밑 없는 커다란 물의 심연이 있었을까?
죽음도 없었고 불멸의 존재도 없었다.
밤낮의 구별도 없었다.
그 [유일물]은 공기로 숨 쉬지 않고 아직은 스스로 숨 쉬고 있었다.
어둠은 더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이 일체(一切)는 끝이 없었다.
그 [허 虛]는 아직 형상을 갖지 않았다.
그 형상은 숨어 있다가
온기(溫氣: 타파스 tapas)의 힘이 그 [유일물]을 만들었을 때에야 나타났다.
그 때 그 [유일물] 속에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것이 영(靈)의 첫 씨앗이었다.
지혜로써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던 현인(賢人)들은 존재가 비존재와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허(虛)를 가로질러 길을 뻗으면서 그들은 물었다.
그 위에 무(無)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 밑에 무가 있었을까?
씨를 뿌리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힘이 있었다.
자유로운 기운이 위에 있었고, 위에는 재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누가 진실로 알며, 누가 지금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나?
[그것]은 어디로부터 태어났고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신(神)은 세상이 창조된 후에야 나타났다.
이 세상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 누가 알랴?
이 세상이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생겨난 것인지는
그가 분명히 안다, 그만이,
가장 높은 하늘에서 살펴보는 이,
그만이 정말로 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엔, 아마도, 그도 모를 것이다!
힌두교 사원에는 다양한 신들이 모셔져 있다. 창조의 신이며 파괴의 신인 쉬바, 자비의 신인 비슈누(Viṣṇu),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Kṛṣṇa), 라마(Rāma)를 모신 사원도 있고, 모든 신들을 모시고 있는 종합사원들도 많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큰 신들을 모셔 놓은 신전보다 하류신인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t)이 모셔진 신전에 사람들이 많았고 칸치푸람(Kanchipuram)에 갔을 때는 쉬바 신의 부인 두루가(Durga) 사원인 까막쉬 사원에 사람들이 붐볐다.
이것은 신의 기능이 생산과 부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한결같이 다양한 신들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즉 한 신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근거는 우파니샤드 (Upaniṣad)의 일원론적인 실재관에서 찾을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결국에는 하나로 묶인다. 단순히 겉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의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 또는 실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바로 브라흐만이다."
인도의 유명한 우파니샤드의 일원론적 실재관에 의하면 신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은 하나이다. 인도종교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인도 특유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3세기경까지 3~4세기 동안 구비전승 되어오다 베다(Veda)에 부속된 여러 문헌에 수록된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결국에는 하나로 묶인다. 단순히 겉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의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 또는 실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바로 브라흐만(Brahman)이다.
모든 만물은 브라흐만으로부터 비롯되어졌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에서는 삼라만상의 눈에 보이는 겉모양만을 보고 그것이 모두 서로 다른 개체라고 여기는 환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즉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하는 분별지로 부터 벗어나 “너와 나와 그”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브라흐만과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Ātman)의 합일을 통해 해탈(목샤 mokṣa)을 이루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을 이룬 상태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사상을 계승한 베단타 철학자중 한 사람인 라마누자(Rāmānuja)에 의하면 인도의 다양한 신격들은 브라흐만의 서로 다른 모습들이다. 브라흐만이 비슈누이고 비슈누는 크리슈나여서 비슈누나 크리슈나와의 합일은 바로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이룬 것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기능적인 속성을 가진 신들인 사구나 브라흐만(saguṇabrahman)보다 무속성의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ṇabrahman)이 더 근원적이라고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모든 만물의 본래의 자리인 법신불, 그리고 법신불의 현현으로서 일반 대중들의 요청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대보살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보현보살, 등등을 떠올리게 한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지만 힌두교와는 다른 독특한 나름대로의 설명체계를 가지고 있던 불교가 일반 대중들의 원하는 것을 수렴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에 오면 힌두교의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끝으로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ītā, 축복된 主의 노래)에 수록되어 있는 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글은 크리슈나가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 하노라.”고 언명한 내용인데 간디(Mahātmā Gāndhi)를 비롯하여 힌두교 지도자와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글이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미워하지 않으며, 자애롭고
자비롭게 사는 사람,
노하는 일도, 자기를 돌보는 일도,
좋은 일 궂은일에 흔들리는 법도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해서 귀찮아하는 일도 없으며, 성내는 일이 전혀 없고,
온갖 기쁨과 슬픔, 또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노라! …
친구와 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며,
모욕과 영예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평화로움을 잃지 않으며,
뜨겁고 차가운 것, 즐겁고 괴로운 것을 가리지 않고
항상 아무 욕망 없이 지내며, 찬사를 듣든지 욕설을 듣든지
언제나 아무 집착 없는 인내를 지키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을 나는 좋아하노라!
아름다운 내용이다. 여기에서 크리슈나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은 보편적으로 인간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지향하는 깨달은 자 즉 아라한(阿羅漢, arhat)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도인들의 85%를 차지하는 힌두교의 이야기는 이정도로 막을 내리고 다음에는 불교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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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월정사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이야기ㅣ
무아 無我
/ 자현스님
초기불교에 있어서 핵심인 연기론緣起論과 무기설無記說은 무아를 변증해 내기 위한 한 수단일 수 있다. 이는 불교교리에 있 어서 무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한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1877 ~ 1962)는 인印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는 그가 인도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싯다르타(부처님의 이름)』는 이러한 연유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제목과는 달리 불교가 아닌 힌두교(바라문교)적인 사상만을 담아내고 있어서 식자들에게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싯다르타』의 첫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 atman(아트만)’이라는 단어가 커다란 글씨로 나타난다. 이는 책의 제목과는 전혀 상반되는 사상인지라 당시의 헤세를 비롯한 서양인들의 동양 사상에 대한 무지를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인도에 있어서 전통 종교는 바라문교(힌두교)인데, 이 바라문교의 발전 과정 중에 우파니샤드(Upanisad)시대가 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특징은 「최고신인 브라흐만(梵)과 인간 개체인 나(我)는 동일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자각을 통해서 존재는 해탈할 수가 있게 된다는 사상이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동학東學의 인내천(人內天: 사람 안에 하늘이 내재되어 있다)사상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범아일여는 완전절대자인 신神이 인간을 창조했고, 그러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신 밖의 질료가 아닌 신 내부의 자신 일 부로써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신과 인간은 결국 동일한 요소에 근거한다는 사고에 의한 것이다. 즉, 인간 내면의 신적인 부분을 아트만이라고 상정하고 이러한 아트만과 절대신(브라흐만)과의 합일을 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붓다의 상대론적인 연기론의 입장에는 이러한 최고신의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절대적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이고 그로써 인간 존재의 불멸적인 근거로써는 미약한 측면을 가지게 된다.
붓다의 절대적 신을 우습게 보는 측면은 곧 이러한 신이 부여한 바의 항상한 그 무엇이 인간에게 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곧장 상응하게 된다. 그것이 ‘항상한 나’인 아트만(atman)의 부정인 안아트만(an- atman)인 것이다.
아트만과 안아트만은 각각 중국불교에서는 아我와 무아無我로 번역되어지게 지게 된다.
무아의 무無는 아주 없다는 의미의 무无가 아닌 가변적인 있고 없음을 나타내는 무無이기 때문에 무아는‘나라는 것은 없다’가 아닌 ‘나라는 것은 항상하지 않다’라고 하겠다.
즉, 이는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을 의미하여 그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원어에서 보이는 안아트만의 안(an)은 영어의 안티(anti:반대의)의 의미로써 안아트만은 ‘항상한 나라고? 웃 기고 있네’ 정도가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입김에 해당하는 것이 인도의 아트만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를 같잖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입김이 들어 온 뒤에 깨어나는 아담이 알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직접 말로써 가르쳐준 것이란 말인가? 이러한 생각들은 단지 인간들에 의한 가설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이 가설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중세를 보낸 유럽인들과 그 중의 1명인 헤르만 헤세가 제목에서는 붓다를 그리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을 아트만으로 판단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관념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분석적 교설이며, 이를 자각할 수가 있다면 곧 해탈의 언덕에 오른다고 경전에는 설명되어 있다. 일초에 수 만 번 깜빡이면서 마치 연속되는 빛을 내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형광등이나, 발전기가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 등은 곧 항상하지 않은 단절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하는 항존하는 패턴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무아, 즉 ‘항상하지 않는 존재의 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누가 붓다에게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태양과 같은 항상한 빛으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형광등과 같이 무수히 깜빡이는 점멸의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붓다는 무아의 교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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