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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 상록수의 여 주인공 채영신(최용신)에 대해 알아봅시다.

arakims 2008. 9. 23. 13:00

최용신 선생(1909 - 1935)

 

 

나라를 빼앗기던 시절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중이던 1931년 10월 YWCA교사로 샘골(천곡)에 파견, 마을사람들과  YWCA지원으로 샘골강습소(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명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활동을 함.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증첩증으로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현 일동818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상록수공원으로 이장됨.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실제화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샘골강습소

최용신 선생께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시던 샘물 강습소가 디오라마로 표현된 공간입니다. 샘골강습소에는 교가, 배지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가에는 나라를 잃었던 암울한 시대에 샘골 아이들을 '선의 빛'으로 키우려는 선생님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1935년

최용신 선생이 강의 중 쓰러짐, 마를 사람들에게 릴레이 형식으로 업혀서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함. 과로로 인한 장증첩증이었음. 샘골 마을 사람들의 헌신적인 병간호(순번을 정함)에도 병세가 악화됨 결국 간호하던 안흥팔이 유언을 기록함.

 

1935년 1월 23일 순직

염석주 선생을 장례위원장으로 사회장을 거행함. 마지막 순간에 사촌오빠가 약혼방지를 끼워줬으며, 약혼자인 김학준이 자신의 코트를 관에 씌워주며 오열함. 11시경 발인, 500명 이상의 조문객 참석.

 

1975년 6월 9일 이장

일리공동묘지에서 샘골 산75번지(현 위치)로 이장

이장 당시 약혼자 김학준의 코트 등이 발견됨.

 

주소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해빛나길 56번지(본오5동 879-4)

전화 : 031-481-3040

 

<줄거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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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느 날 동혁은 영신에게서 건강이 쇠약해져 쉬는 동안 한곡리로 오겠다는 편지를 받는다. 마을 사람들의 후한 인심에 점점 건강을 되찾은 영신은 동혁을 중심으로 자리잡혀 가는 한곡리 마을 을 둘러보며 동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새삼 확인한다. 그들은 삼 년 동안 마을의 터를 닦고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청석골로 돌아온 영신은 힘차게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원래 가난한 마을이라 기부금을 받으러 돌아다녔지만 돈이 한창 마른 때라 잘 걷히지 않았다.

 

 

어느 날 영신은 주재소에 불려가 예배당이 낡았으니 공부하는 아이들을 팔십 명으로 줄일 것과 기부금을 너무 조르면 법률 저촉이 된다는 엄중한 주의를 받았다. 자기 손으로 가르쳐 오던 아이들을 선착순으로 잘라 내야 하는 것이다.

 

영신은 팔십 명의 아이를 예배당 안에 앉히고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창문을 열어 젖혔다. 영신은 무슨 짓을 해서든 학원을 지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두 달 열흘 남짓해서 '청석학원'은 문패까지 걸게 되었다. 대충 마루만 깔아 놓은 상태였다.

 

낙성식에는 학부형들과 집을 짓는 데 수고를 한 사람들 등으로 꽉 찼다. 영신은 인사말을 하던 중 쓰러지고 동혁에게 업혀 병원으로 간다. 수술을 끝내고 영신의 건강은 좋아진다.

 

 

동혁은 어느 날 아침 아우의 급한 편지를 받고 한곡리로 돌아가 일을 해결했으나 술김에 회관에다 불을 지르고 도망친 동생 대신 잡혀가고 영신은 무리하게 마을 일을 하다 쓰러져 숨지고 만다. 출감하는 길로 달려온 동혁은 영신의 무덤에 가서 다짐하고 한곡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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