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카오 Macau/마카오 Macau

성 바울 성당은 200여년전 조선인 문순득의 표류기에 나오는 곳

arakims 2015. 11. 1. 21:23

KBS가 제작 방송한 '홍어장수 문순득'의 역사 스페셜입니다.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cD8P8tMzlLU&feature=player_detailpage

 

200여년전 홍어장수 문순득이 1803년경 보았을 성 바울 성당

지금은 1835년 인접 건물에서 발화한 화재로 소실되어 전면 건축물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순득은 조선이 물물교환하던 시절에 살았지만

마카오에서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보고와서 훗날 소상하게 정약전에게 전하였다.

낮선 마카오에서 편리하고 합리적인 화폐의 유통,

유교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살다 처음 만난 천주교 등등

서양의 새로운 많은 문화를 처음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녀간지 35년 지난 뒤 김대건 신부님께서도 신학 공부를 하셨던 마카오......

그런 역사적인 현장에 오늘 저도 서있었습니다.

 

여행은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16세기 세계를 누비던 포르투갈은 청나라에게 해적을 토벌해주고 마카오반도를 조계지로 삼았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은 마카오 전체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듭니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마카오는 서로 다른 분위기가 납니다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이 지은 성 바울 성당 등 여러 성당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파스텔톤의 이국적인 건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성바울성당은 1835년 인접 건물의 발화로 인해 대부분 소실된다. 문순득 일행이 다녀갈 당시에는 소실되지 않았던 큰 성당으로 남은 건축물로 보아 큰 규모의 성당임을 추정하게된다. 세월이 흘러 마카오는 1999년에 중국에 반환되었고 홍콩과 함께 2049년까지 현재의 마카오는 1국양제를 정한 기본법에 의해 2049년까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를 지속하는 것이 보장되고 있다.

 

 

전남 신안군 우이도 출신의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어민이었다.

그는 200여년전 32개월 동안 바닷길을 떠돌면서 발달된 해외 문물을 체험하고 돌아온 역사적인 인물이며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이기도 하다.

180112월에 그는 흑산도와 홍어 장사를 해왔던 인물로

작은 아버지와 동료 네 명과 홍어를 사러

남쪽으로 수백리 떨어진 태사도로 가게된다.

1802118일 돌아오는 길에

만난 풍랑을 시작으로 그의 표류 기행은 시작된다.

지도와 나침반도 없던 그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고

풍랑 속에 밀려다니다가

2주 후에 한 섬에 가까스로 상륙하게 되는데(22)

그곳은 유구국(琉球國)으로 지금의 오끼나와라는 곳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나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록도 있는 나라였지만,

문순득 일행에게 낯선 나라

유구국 양관촌에서 조사를 마친후에

관리들이 지키는 일정한 곳에 머물게된다.

머무는 동안 유구국에서 적대시하거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과의 관계는 부드러웠던 것 같다.

유구국에서 아홉 달 동안 머문 일행은

귀국 계획을 짜고

그해 107일 세 척의 배로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에는 조선과 정기적인 항로가 없어서

가장 지름길이 중국으로 상륙하는

선편을 선택하는게 현명한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배는

 

 

또 다시 폭풍우 때문에 표류를 거듭하게된다.

그런 큰 역경을 헤치고 당도한 곳이

여송(呂宋),

즉 필리핀의 루손섬이라는 곳이었다.

1802111일이었으니

이번에는 3주 정도를 바다에 떠밀려 다닌 것이었다.

문순득 일행은 필리핀에서

이듬해 3월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그가 보았다던

성당은 그 마을에 지금도 남아 있다.

316, 필리핀에서

그는 놀라운 현지 적응력을 발휘하였다.

실을 잣는 일로 돈을 벌어

귀국 여비를 마련한 뒤

김옥문과 함께 중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다행스럽게 이번 항해는 무사히 끝나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는 16세기경 부터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는곳이기 때문에

발달된 유럽 문명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마카오에서 그가 보았다던 성바울 성당은

지금도 남아있다.

마카오 관리들의 조사를 거친 후에

광동을 경유하여 북경, 의주를 거쳐

서울로 오기까지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 다시 배를 타고

고향 우이도에 도착하였으니

이때가 180518일이었다.

180112월에 고향을 떠나

18051월에 고향에 돌아오니

32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는 당시에 우이도에 귀양살이를 하는

정약용의 형 정약전에 의해

1805년에서 1816년 사이에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을 썼고,

1818년 또 다른 귀양자 유암이

이를 보충하여 역사에 남겼던 것이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표류담에서 실마리를 얻어

화폐제도 개혁안을 내놨고,

정약용의 제자 이강희는

문순득이 보고 들은 선박 제조 기술에 바탕해

우리 해양 사상 최초의 외국 선박 논문인

'운곡선설'을 저술 했다고 한다.

그는 표류하던 시절

필리핀의 말을 익히게 되었는데

필리핀 표류자들의 통역을 맏는 등의 업적을 남기었으며

책의 말미에 적힌 필리핀, 류큐의 고유문자의 발음을

한글표기로 남겨 전해온다.

 

 

만화로 보는 문순득의 표해시말 http://blog.naver.com/dk5238/220182909057

김대건신부가 서양문물을 접한 마카오   http://blog.naver.com/dlrrbs80/220041504550

조선의 홍어장수 문순득 http://blog.naver.com/shinc0503/220345516283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125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