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공산성(해발250m)은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송공리에 있다.
송공리 송공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성터로 추정하게 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牧 古蹟條
- 高麗史節要 卷1, 太祖神聖大王 元年(918年)條
- 高麗史節要 卷17, 高宗 丙辰43年(1256年)6月條
위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압해도의 역사와 송공산성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당시에 서남해안 및 도서지역에는 많은 수의 현치소라는게 있었다.
이들 현치소가 있는 지역은 중요 해상활동로와 연결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시하바다 등의 큰 바람과 파도를 피해 항해의 안전성, 짧은 이동거리 확보를 위한 해상수로)
내륙의 어느 지역 못지않게 많은 군현들이 분포될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갗주었다.
학계에서는 서남지역을 통과하는 해로상의 군현들은
장산도에 설치되었던 거지산현과
압해도에 설치되었던 아차산현이 장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으며
송공리 인근 지역의 명칭이 압해군으로 바뀌면서
안파현(장산도), 갈도현(영광 군남면), 염산현(영광 염산면)을 속현으로 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말기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 확보를 위한
쟁탈전에서 이들 3군현들은 철저한 후백제 지원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왕건의 반대 입장에선 압해군은 인접된 지역과 함께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한 뒤에도
고려왕조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행정구역 개편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무엇보다도 압해군이 이러한 반 왕건세력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후백제 지원을 위해 송공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왕건이 반도의 서남부지역을 장악하는 데 있어서
최후의 목표는 나주점거이었을 것으로들 많이 소개되었지만
압해지역의 중요성에 대한 소개는 약간 소홀한 편이다.
새로운 왕조 탄생 이후에도
서남해안과 도서지역 일대의 세력이 친백제적인 성향의 지속으로
후백제 멸망 이후 새롭게 통일된 정권의 유지 발전을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장악의 한 방법으로 중앙정부가 잠재적인 강력한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이들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다스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압해도의 중요성을 되새겨보면
서남해를 잇는 가깝고 안전한 해상루트의 중요성이었을 것이다.
시하바다의 거센풍랑에 비하면 압해도 내해는 잔잔한 안방과 같다.
지금은 퇴적물이 쌓여 얕아진 바다로 인해 여객선도 다니지 않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여몽 항쟁 당시 몽고군 차라대는 수군 70여척의 대선단으로 공략해온적이 있으나
도민들의 대포를 동원한 항전으로 물러섰던 기록이 있고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이 지역을 거쳐 진도, 제주도로 향향할때 중요 루트가 되었으며
일본은 한반도 침입의 전초전으로 이 곳에서 압해 해전을 치루었던 바 있다..
송공산성에 대한
일제시대의 조선보물 및 유적 조사기록에
'송공산정에 소형의 석루 및 우물 1개가 있으며
전설에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산성지라 전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고
조사보고 되어있고 <문화유적총람> 또한 동일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2011.11.11) 송공산성은 오랜 세파와 관리부재로 훼손된 상태가 심하여
대부분 유실된 흔적조차 찾기 어려우며,
정상에 약간의 석축(높이 약2,5미터 넓비7미터)이나마
당시를 추정할 수 있게 해주고 있을 뿐이라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참고자료
★송공산의 청미래 덩굴 http://blog.daum.net/arakims/15958482
★압해대교의 야경 http://blog.daum.net/arakims/15958600
여기까지 읽어주신.^^ 님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