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약소국 하와이, 미국에 맞서다

arakims 2006. 8. 29. 19:26
 

 

 

하와이-일본 연합을 실현하고자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방문했던 칼라카우아 하와이국왕. 미국 정부가 금지했던 '훌라'춤을 부활시키고 하와이의 전설과 신화를 편찬하는 등 민족의식이 강했던 영민한 군주였다.

 

범태평양을 아우르는 하와이-일본 연합 구상 


지난 8월 24일  오후 8시 30분 NHK 「그때, 역사는 움직였다(その時,歷史が動いた) 」에서는 「환상의 하와이-일본연합(幻のハワイ日本連合)」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하와이 국왕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1836. 1. 16~ 1891.1.20)가 미국의 하와이 병탄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 하와이-연대를 이루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19세기 후반 하와이는 제국주의의 파도에 휩싸였다. 아시아시장 진출의 발판으로 태평양 제해권 장악을 노린 미국은 하와이를 태평양 전략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미국은 19세기 진주만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진주만을 극비 시찰한 미군보고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 하고 있다(1873년 미 육군장관 베르크나프에게 보낸 스코필드 육군소장과 알렉산더 대령의 진주만 군사시찰 결과 보고서)


“진주만은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충분한 깊이를 갖고 있으며 군항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미국은 먼저 하와이에 경제진출을 시작했다. 거대한 사탕 수수 농장을 기반으로 미국인들은 활동의 영역을 정치 군사에 까지 넓혔고 하와이의 중추를 장악했다. 외압이 기세를 멈추지 않았던 1874년 칼라카우아는 38세의 나이로 국왕에 올랐다. 미국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소국 하와이의 힘은 미약했다. 왕은 「하와이-아시아 연합」을 이뤄 구미열강에 대항하려는 발상을 했다.


칼라카우아왕은 1881년 1월 2일 하와이를  출발, 세계 주유(周遊)에 올랐다. 미국 정부는 왕에 대한 감시역할로 두 사람의 미국인을 동행케 했다. 방문국은 중국 싱가포르 홍콩 인도였다. 최초목적지는 일본이었다. 그해 3월 4일 일본에 도착했다. 칼라카우아왕은 일본은 방문했다. 일본의 접대는 성대했다. 하와이 국가(Hwaii Ponoi)가 연주되고 회담장 테이블은 꽃장식으로 ALOHA(반갑습니다)라고 새겨졌다. 왕은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선 일본 육군 1만명이 질서정연하게 열병하는 모습을 사열했다.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하와이는 겨우 500여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3월 10일 이시카와(石川) 병기창을 방문, 일본의 높은 군수기술에 다시 놀랐다.


 왕은 감시역할을 맡은 미국인 국무장관 암스트롱 일행을 따돌리고 아카사카 이궁(赤坂假御所)을 방문, 메이지 천황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왕은 아래와 같은 발언을 천황에게 했다.


“아시아 제국은 열강의 지배를 받으면서 서로 고립을 심화하고 있으며 대책이 없다.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각국이 일치 단결해서 구미에 대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진보는 실로 경탄할 만하다. 아시아연합을 발족시키면 맹주는 천황폐하가 돼야 한다.

 

  지금 열강제국은 이기주의에 치우쳐 아시아제국의 불리함과 곤란을 돌보지 않는다. 아시아의 급무는 연합동맹해서 열강제국에 대치하는 일이다. 만약 연합이 실현되면 열강제국에 치외번권을 인정할 수 있다. 아무쪼록 협력해서 아시아제국연합을 맺고 그 맹주가 됐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폐하를 지지하고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카이며 왕위계승자인 카리우라니 왕녀와 일본황족의 혼인, 일본-하와이 연합, 일본 하와이간 해저전선 부설 등을 논의했다. 메이지천황은 깊이 생각[熟慮]한 후에 회답을 하겠다고 즉시 답을 주지 않았다(明治天皇記).


이러한 밀담은 미국인 수행원에게 발각돼 잘못되면 국제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강한 항의에 부딪친다. 그후 칼라카우아왕은 중국 홍콩 인도 등을 방문하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1881년 10월 29일 하와이에 귀국한다.



일본, 즉답 피하고 1년후에 거절 답신


 당시 일본에선 ‘아시아연대’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서구열강의 아시아 진출에 위기심 팽배한 상황이었다. 메이지시대 자유당의 잡지 『近時評論』1881년 4월 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아시아 전지역이 합종해서 구미의 권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해야할 시대다”


 그러나 일본 자신도 발등의 불도 끄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1854년 개항이래 미국 등 구미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 개정에 국력을 집중해도 시원찮은 상황이었다.1년후인 1882년 메이지 천황의 회답서가 하와이에 도착했다.


“동양제국이 서로 협력해서 구미열강과 대치하는 것은 확실히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나도 원대해서 도저히 간단히 추진될 수 없다. 이 계획의 실현은 현단계에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절이었다. 칼라카우아왕의 하와이-일본연합은 발상으로 끝나버렸다. 1882년 5월 칼리카우아왕은 친미파를 축출하고 자파로 내각을 구성했으나 7월 미국이주민의 무장쿠테타로 한달여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 비운의 왕은 1891년 1월 20일 54세로 세상을 떠난다. 1898년 8월 12일 하와이는 미국에 병합됐다. 결국 하와이는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 흡수됐다. 


  이 프로그램은 은연중 당시 아시아의 유일한 맹주는 일본이었으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연대가 시대의 흐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그러나 자국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무리 이상이 좋아도 외세에 의한 생존에는 한계가 있다는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 百花濟放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메모 :